지금 생각하면 학생들한테 그런 교육을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시대적 상황이 그런 요구를 했던 것도 같다. 교련(敎鍊) 얘기다. 1970~80년대 고등학교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흰 바탕에 검정색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두 시간씩은 한 것 같은데 제식훈련과 총검술, 고무 수류탄 던지기가 주였다. 예비역 장교인 교련 교사는 으레 군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파리도 앉다가 미끄러질 만큼 반짝반짝 광을 낸 군화에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 40~50대 독자들은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 훈련'은 일제 시대에 2차 대전의 전황이 저들에게 불리해질수록 강화됐다. 일제의 잔재라고 할 수도 있는 교련이 한국에서 부활한 것은 1969년이었다. 그 전 해에 북한 124군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한 엄청난 사건(1ㆍ21사태)이 벌어졌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긴박한 남북 대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 과목을 넣었다. 물론 명분은 안보의식 확립이었다.
■ 당시에는 고교 학생회도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으로 군대식으로 편제돼 있었다. 고교마다 몇 명씩 '화랑'을 뽑아 2박 3일간 충남 아산 현충사, 포항제철(현재의 포스코), 풍산금속을 견학시키기도 했다.
경주에 들러서는 신라 기와를 탁본해 보는 시간도 있었다. 그 때는 나름대로 감동이 있었다. 현충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애국 정신을 되새기고, 포철에서 시뻘건 쇳물을 보며 발전의 힘찬 고동을 느꼈고, 풍산금속에서는 우리 기술로 포탄 만드는 것을 보면서 가슴 뭉클했다. 학교를 대표하는 화랑이라는 이름에 자부심도 느꼈다.
■ 그런데 군사문화를 상징하는 교련복이 자유의 숨통을 틔워준 것은 아이러니다. 남학생들에게 교련복은 까만 교복의 억압을 다소나마 완화시켜주는 장치였다. 소풍도 교련복을 입고 가고, 학교를 나서면 대개 교련복을 입고 다녔다. 그래서 교련복을 입은 학생의 자세는 교복을 입은 학생보다 훨씬 느슨한 편이었다.
교복을 입고는 여학생을 놀리기 어렵지만, 교련복을 입으면 왠지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작은 일탈은 저질러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은 선택과목으로도 가르치는 고교가 드물어진 교련 교과가, 이름마저 '생활 안전'으로 바뀐다니 이런저런 감회가 든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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