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발행인의 독단적 기사 삭제에서 비롯된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사태가 기자들의 무더기 징계와 노조의 파업, 회사측의 직장폐쇄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이 잡지의 전현직 기자들이 자신들의 직업 정체성을 더듬어보는 책을 만들고 있다.
<기자로 산다는 것> 이라는 표제로 다음주 출간될 이 책의 텍스트를 미리 들여다보노라니, 언론계 한 귀퉁이에 인연을 걸쳐놓은 자로서 알량한 책임감이 새삼 느껍다. 기자로>
● 시사저널 사태로 느끼는 책임감
일간신문과 방송과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지배하는 미디어 시장에서 인력이 넉넉지 않은 한 시사주간지가 시사저널만 한(곧이곧대로 말하자면 한 달 전까지의 시사저널만 한) '신뢰의 힘'을 키우자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문가 못지않은 안목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때, 시사주간지는 주류 저널리즘의 '뒤늦은 요약'이 될 수밖에 없다. '뒤늦은 요약'이 되지 않으려면 시사주간지 기사는 주류 저널리즘이 다다르지 못한 심층성을 움켜쥐어야 하고, 기사의 심층성을 떠받치는 것은 기자의 전문성이다.
시사저널은 그간 적잖은 기자들의 전문성에 힘입어 심층기사의 전형을 도톰히 보여주었다. <기자로 산다는 것> 의 글 몇 개에는 초년기자가 세월과 나란히 전문기자로 자라나는 과정이 담겼다. 기자로>
신뢰의 두번째 조건은 공정성이다. 기사의 공정성은 기자가 특정 정파로부터는 물론이고 자본이나 노동을 우람하게 대표하는 주류 사회세력들로부터, 더 나아가 사사로운 인연으로부터도 독립될 때만 확보된다.
그런 독립적 시각들이 획일적일 수는 없다. 그것들은 때로 맞버티기 십상이다. 그렇게 맞버티는 독립적 시각들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권한이 편집권이다. 그러니 편집권은, 바람직하기론, 기자공동체 전체가 공유할 수밖에 없다.
시사저널은 그간 그런 독립적 시각의 견지와 그 시각들의 합리적 조율에 충실해 왔다. <기자로 산다는 것> 에선 시사저널 기자들이 정파와 사회세력과 사적 인연으로부터 독립적이 되기 위해 쏟아온 노력의 자취가 엿보인다. 기자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는 장영희 기자의 글에서도 이 점이 또렷하다. 그는 경제전문기자로서 자신이 문제삼아 왔던 것은 기업이 아니라 기업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삭제기사의 핵심이기도 했다.
시사주간지가 주류 언론과 경쟁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은 소위 '근성'에서 나올 것이다. 시사주간지의 장처(長處)라 할 탐사기사는 심층성만이 아니라 지속성으로도 뒷받침돼야 한다. 시사저널은 이 점에서도 나무랄 데 없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나 군대 의문사 사건 그리고 최근의 제이유그룹 사기사건을 비롯해, 시사저널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0년도 훨씬 넘게 한 사안을 추적하며 이 문제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구해 왔다.
그리고 시사저널의 장기 탐사기사들은, 드물지 않게, 주류언론에서도 메아리를 얻었다. <기자로 산다는 것> 은 시사저널 기자들의 그 '근성'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기자로>
● 매체 신뢰는 기자에게서 나온다
<기자로 산다는 것> 의 텍스트에는 드문드문 격정과 집단적 자기애가 배어있다. 격정과 자기애는 결코 저널리스트의 미덕이 아니지만, 시사저널 기자들로 하여금 이 힘겨운 싸움을 버텨내게 하는 미량원소일 것이다. 기자로>
고제규 기자는 수습시절을 되돌아보며 선배 기자가 툭 내던진, '기자가 곧 매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고 기자는 그 말을 '기자 개개인이 시사저널 안의 또 다른 매체'라는 뜻으로 해석하며, 기자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기사는 결코 쓰지 않는 '시사저널 문화'가 그 말에 담겨있다고 덧붙인다.
그것이 옳은 해석이겠으나 나는, 바깥사람으로서, 그 말을 '기자의 됨됨이와 태도가 매체의 성격을 규정한다'라는 뜻으로 평범하게 해석하고 싶다. 한 달째 나오고 있는 '대체 시사저널'은 내 식으로 이해한 '기자가 곧 매체다'라는 말의 엄중함을 새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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