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구 가산동의 이랜드 그룹 가산사옥. 8층 건강증진실에 들어가니 근무 중 짬을 낸 예비엄마 6명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임신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라마즈 분만법과 모유수유 등 산전(産前)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자료를 보며 간호사인 손명순 실장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의 표정에서 직장생활에 찌든 임신 여성의 피로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임신 3개월인 안진선(30ㆍ아동복 디자이너)씨는 “회사 안에서 태아 건강에 필요한 예방주사도 맞고 컴퓨터 작업 중 전자파를 차단하는 앞치마도 두를 수 있다”며 “여성 디자이너들은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는 게 보통인데 우리 회사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어 좋다”고 말했다.
이랜드 그룹은 여대생들이 가고 싶은 직장으로 늘 첫손에 꼽힌다. 그룹 모체인 패션산업의 여성 종사 비율이 높은 탓도 있지만, 여성을 우대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기업 문화의 영향이 더 크다는 분석이다. 가부장적 분위기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직장 여성의 편의를 봐준다는 것은, 그 여성이 속한 가정을 동시에 배려한다는 의미와 통한다. 그래서 이랜드 그룹은 최근 여성가족부의 가족친화지수 조사에서도 190개 국내 기업 중 최상위권에 자리했다.
●채용 및 승진 때 성차별 전혀 없어
이랜드 그룹은 창업 초기부터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1997년 서울시에서 주는 ‘여성우대 기업상’을 수상했고, 2004년엔 전문직여성한국연맹(BPW)으로부터 금상을 받았다.
이랜드 그룹이 무엇보다 자랑하는 가족친화 정책은 성차별 없는 채용 및 승진제도다. 신입사원 채용 때 여성 지원자의 면접시험은 원칙적으로 여성 상사가 담당한다. 만의 하나 남성 상사가 업무역량이나 재능보다 외모에 치우친 평가를 할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면접 방식은 이랜드 그룹의 전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2000년 연봉제로 전환하면서 신규 채용 때 남성의 군복무 경력에 가산점을 주는 조항을 없앴고, 2005년부터는 인터넷 서류전형에서 학력은 물론, 아예 성별 기재란까지 없애 성차별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그 결과, 지난해 상반기 신규 채용인원 310명 가운데 여성이 170명(55%)으로 절반을 넘어섰다. 2005년 말 기준 여성인력 비율도 전체 임직원의 46%나 된다. 특히 과장급 이상 간부직의 여성비율은 일반 기업에 비해 2~3배 가량 높은 40%에 달한다. 대리급 여직원 비율이 44%, 주임급 여직원 비율은 53%이며, 해외 현지 채용인력 5,000명 중에도 여성인력이 3,500명(70%)이나 된다. 현재 <로엠> <로이드> <브렌따노> 등 의류 브랜드와 인테리어, 광고 등 20여 개 사업부문의 책임자도 여성 본부장이 맡고 있다. 브렌따노> 로이드> 로엠>
남성 중심의 사회 분위기 탓에 직장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부담도 이랜드 그룹에는 거의 없다. 여직원에게 상사의 개인 심부름이나 허드렛일을 시키는 문화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성별과 직급을 막론하고 사적 업무는 물론, 청소도 직접 하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바탕의 사풍 덕에 접대나 술자리 회식 문화도 오래 전에 사라졌다. 대신 월 1회 이상 부서 단위로 영화ㆍ연극ㆍ뮤지컬 관람 등 문화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룹 홍보실 김용범 팀장은 “업무나 직장 문화에서 성차별이 없다 보니 오히려 남성 직원들이 역차별을 받는 게 아니냐는 우스개 소리까지 들을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출산과 육아는 여성우대의 기본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결혼과 출산이다. 하지만 이랜드 그룹은 여직원의 결혼이나 출산이 직장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지난해 말 현재 전체 여직원 중 기혼여성 비율은 46%이며, 이 중 자녀를 둔 비율도 68%나 된다. 이는 이랜드 그룹이 기혼여성 배려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행해온 덕분이다.
이랜드 그룹은 96년부터 임신 여직원을 대상으로 분기마다 모유수유 2회, 라마즈 호흡법 1회 등 산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회사 차원에서 4대 보험과는 별도로 전 직원 대상의 단체보험을 들어 분만비와 보육비도 지원하고 있다. 출산 여직원들이 직장 내에서 모유수유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현재 이랜드 그룹의 일정규모 이상 모든 사업장에는 모유착유기와 소파, 냉장보관시설이 갖춰진 ‘모유착유실’이 마련돼 있다. 출산 여직원에게는 매일 1시간30분씩 착유시간이 보장된다.
출산 10개월째인 정숙미(31ㆍ기술연구실)씨는 줄곧 회사에서 모유를 짜 퇴근 후 아이에게 먹이고 있다. 그는 “매일 오전과 오후 30분씩 모유착유실에서 하루 1병(240㎖) 분량의 모유를 짜 아이에게 가져간다”며 “착유실 자체가 없어 화장실에 앉아 모유를 짜는 다른 회사 여직원들과 비교하면 정말 행복한 셈”이라고 자랑했다. 정씨는 “입사 전만 해도 이랜드에 대해 별 호감이 없었는데 2001년 모유착유실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고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고 덧붙였다.
태아의 건강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일주일에 3차례씩 회사 내 건강증진실을 찾는다는 임신 6개월의 최해주(27ㆍ아동복 디자이너)씨는 “아이를 키우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사회 분위기지만, 회사가 출산과 육아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어 2명 정도는 낳을 생각”이라며 밝게 웃었다.
글ㆍ김용식기자 jawohl@hk.co.kr사진ㆍ조영호기자 voldo@hk.co.kr
■ '로엠' 사업본부장 정수정씨
“다닐수록 일 해볼 만한 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심히 하다 보니 벌써 본부장까지 됐네요.”
㈜이랜드월드의 패션 브랜드 <로엠> 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정수정(35)씨는 이랜드가 3번째 직장이다. 1995년 대학 졸업 후 당시엔 잘 나가던 기업인 ㈜대우에 입사했지만, 남성 중심적 기업문화는 여성으로서 넘기엔 너무 높은 벽이었다. “함께 입사한 동기인데도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지는 일이 달랐어요. 여직원은 결혼하면 당연히 그만둬야 하는 분위기였고요.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헤쳐 나가보자고 마음 먹었는데 벽이 너무 높았어요.” 로엠>
사범대 출신인 정씨는 1년 만에 ㈜대우를 나와 사립학교에 취직했지만 역시 성에 차지 않았다. 능력에 따라 보상 받는 활기찬 직장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사는 내 천직이 아니다’ 싶은 생각에 금세 그만두고 말았다.
정씨는 96년 중반 당시 여대생들의 취업선호도 1위였던 이랜드에 입사했다. ‘남녀차별이 없는 회사’라는 세간의 평가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입사 후 대리점 관리를 하는 영업 분야에 배치돼 남자와 똑같이 궂은 일을 떠맡았다. 지방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보통 3, 4일씩 여관에서 혼자 지내기 일쑤였다.
당찬 성격의 정씨에게도 출산을 전후해 위기가 찾아왔다. 첫 아이를 임신한 2000년 유산기를 겪으면서 1, 2주 가량 입원하는 일이 3차례나 반복됐다. 출산을 4개월 가량 앞두고는 “몸이 약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누워있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정씨는 회사를 그만 다니겠다고 결심하고 상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상사는 “부서원들과 대책을 마련해 보겠다”며 정씨를 안심 시켰고, 며칠 뒤 “푹 쉬고 건강한 몸으로 다시 나와 일해달라”고 부탁했다. 정씨는 “임신 기간 대부분을 휴직 상태로 지낸 데다 산후 휴가까지 마치고 나온 저를 동료들이 따뜻하게 맞아줬다”며 “그 때의 경험이 일에 지칠 때마다 내게 다시 힘을 주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정씨 역시 평소 업무에서는 부하 직원들을 강하게 몰아붙이는 독종이지만, 출산이나 육아, 집안사정 등으로 조퇴ㆍ휴가를 요청하는 직원에게는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해당 업무를 맡을 직원이 없을 때 야근을 자청한 적도 여러 번이다. 정씨는 “여직원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회사가 이랜드”라며 “힘 닿는 데까지 열심히 뛰어볼 생각”이라고 밝게 웃었다.
김용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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