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책을 많이 복사했다. 주로 원서였다. 외국 여행도 흔치 않고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의 답답한 시대라 누군가 쓸만한 원서를 갖고 있으면 온갖 아부와 수선을 피우며 책을 빌리고 복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 베끼기는 전국민적 현상
저작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이 그 무렵, 팔십 년대 후반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언니가 그 복사 책들을 보고 경악하면서, 외국에선 저작권 보호를 위해 책 전권을 복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학 도서실에서조차 기꺼이 전권을 복사하고 제본까지 해주던 터라 나는 그게 무슨 같잖은 소린지, 용돈을 쪼개 복사 책이나 구하는 동생에게 한 살림 거덜내고 유학 다녀온 언니가 별 유세 다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십년이 흘러 그 무심의 칼날이 나를 겨냥할 줄이야. 문제의 발단은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반 독자들은 잘 읽지도 않는 희곡작가.
그러므로 작가로서의 내 권리를 확인시켜줄 사람들은 대부분 전공자인데, 작가가 된 뒤로 나는 그들과 눈물 나는 투쟁을 전개하는 중이다. 작가 동의 없이 공연을 올리는 아마추어 연극팀, 자신들의 취향대로 작품을 난도질하는 제작진들, 기준점을 알 수 없는 작품료.
최근엔 이 대열에 연기 전공 학생도 가세했다. 대학 연극학과의 실기 입시로 내 희곡이 선정된 뒤, 인터넷에 그 작품이 유령처럼 떠다니기 때문이다. 초기엔 짤막한 독백만 유통되더니 최근엔 전체 작품이 유통되는 눈치고, 그런 역할을 주도해온 한 연기학원에 항의했더니 다른 곳에서도 다 그렇게 한다는 적반하장의 답변만 들려왔다.
연초부터 표절 시비가 심심찮다. 대부분은 지식인이 제자의 글을 표절했다는 사안만 문제 삼는 눈치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게 보자면 이 사건은 지식인의 표절에 국한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근대를 베끼느라 혈안이 되었던 원숭이 나라, 그 과정에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진 이상한 나라의 전 국민적 현상일 뿐이다.
노점에서 파는, 진짜 뺨치는 저 무수한 루이비통 가짜 핸드백을 보라. 학자들은 서구에서 유행하는 첨단 이론을 따라하느라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학생들이 제출하는 리포트는 인터넷에서 짜깁기한 내용들로 넘쳐나며, 컴퓨터와 엠피스리의 행복한 만남 속에 음반시장은 진작부터 바닥을 쳤고, 방송계는 한류를 외치면서도 뒷구멍으론 일본작품을 베끼느라 정신이 없다.
사람은 체면을 차려야 하는 법이라고, 어린 시절 내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그 한국적 예도는 다 어디로 갔나.
● 국가적 차원에서 정비해야
부끄럽지만 우리 모두 원숭이병 감염자고, 우리를 치유할 백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마녀 사냥하듯 한두 명의 표절만 문제 삼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정비가 필요하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저작권을 전담하는 기구가 마련된다면 힘없는 신인작가들이, 혹은 방법을 몰라 작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번역극을 올리는 가난한 극단들이 백신을 맞듯 길을 찾을 텐데.
김명화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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