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신표현주의, 중국과 인도의 현대미술을 잇따라 국내에 소개해온 아라리오 갤러리가 아직 아시아에 덜 알려진 유럽 작가 6인의 작품으로 유럽 현대미술전을 시작했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스위스관을 대표할 우고 론디노네(43),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본전시관 첫머리를 차지했던 모니카 본비치니(42ㆍ이탈리아)는 국제적으로 자리를 굳힌 작가이고, 한스 옵드 벡(38ㆍ벨기에), 데이비드 렝글리(33ㆍ스위스), 로베르토 코기(34ㆍ이탈리아), 마르쿠스 쉰발트(34ㆍ오스트리아)는 한창 성가를 올리고 있는 작가들이다.
26일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막한 이 전시는 <우리들의 마법 같은 시간> 이라는 향수 어린 제목을 달고 있다. 기획자인 이탈리아의 독립 큐레이터 밀로반 파로나토는 “지금 이 순간에 있으면서도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되새김질하는 유럽인들의 사고 방식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플래시백(Flash backㆍ영화에서 과거를 회상했다가 현재로 되돌아오는 편집 기법) 같은 전시”라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첫번째 방에는 론디노네의 작품 4점이 놓여있다. 100살이 넘은 올리브나무를 플라스틱으로 본뜬 노란 조각, 그 뒤에 단정하고 푸른 거울의 문, 문의 안쪽 천정에서 내리는 하얀 종이눈, 벽에 붙어있는 창틀 모양 설치물. 전시 기획자가 독립적인 작품을 한데 모아 모종의 드라마를 연출한 이 공간은 거울 문의 작은 구멍에서 피어 오르는 향 냄새에 휩싸여 묘한 자극성을 띤다. 지독하게 간결한 이 작품들은 동시에 지독하게 탐미적이다. 문 밖에 나무가 서 있고, 문 안에 눈이 내리고,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창 아닌 창이 나 있는 공간은 자폐적인 초현실이다. 눈 내리는 장치에 붙어있는 작품 제목 <과거? 현재? 미래? 그런 건 없어> 에서 그 세계를 요약하는 독백을 듣는 듯하다. 과거?>
론디노네가 ‘없다’고 한 시간이, 옵드 벡의 조각에서는 얼어붙었다. 온통 하얀 방에 길이 8m, 높이 1.7m의 거대한 식탁과 의자를 설치했다. 막 식사를 마치고 사람들이 떠나버린 식탁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한 재떨이, 먹다 남긴 케이크 조각, 대충 접어놓은 냅킨이 놓여있다. 케이크에 얹은 딸기, 접시에 묻은 크림만 빼곤 온통 하얀 이 작품은 관객을 어른들의 식탁을 올려다보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돌려놓는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흰 색 안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간을 가둔 채.
기획자의 설명을 듣고 그 틀에 맞춰서 보려고 한 탓일까. 전시 전체의 느낌은 늙고 지친 유럽의 조용하고 우울한 초상을 보는 듯하다. 오랜 전통의 긴 그림자를 밟고 혁명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품 있지만 기운 없는 노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씁쓸하고 아련한 시선, 멈춰버린 시간과 열리지 않는 내일의 경계에서 그 안팎을 붙들려는 탐미적인 집착, 이해할 수 없음 혹은 접근 금지를 선언하는 차가운 벽….
쉰발트의 싱글 채널 비디오작품 <사랑에 빠진 10명> 에서 그러한 느낌은 좀더 통속적으로 다가온다. 의자에 꼼짝 없이 붙들린 여자, 갑자기 달려들어 서로 껴안았다가 조용히 떨어지는 두 남자, 여자의 옷에서 등의 지퍼를 여는 순간 깨끗하게 절단되는 탁자…. 영상 속 상황은 기이하고 인물들은 무표정하다. 정교하게 안무한 아름다운 춤을 보는 듯한, 그러나 부자연스런 그들의 몸짓은 체념에 가깝다. 사랑에>
이 시무룩한 작품들 틈에서 렝글리의 설치작품 <어두운 밤, 갑작스레 다시 밝아지다> 는 은근한 온기로 이채를 띤다. 온통 까만 방에 온통 까맣게 칠한 탁자, 의자, 각목, 그릇 따위 잡동사니를 늘어놓은 이 작품은 검은 방 한복판에 톱밥을 뿌려 놓아 그 부분만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멀리서 보면 빛의 명암 대비로 화면에 강력한 아우라를 띄웠던 렘브란트나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2차원 평면으로 물려받은 유럽 미술의 유산을 3차원 공간에 재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두운>
전시는 3월 11일까지. (041)551-5100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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