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던 날 야당 대변인은 "헌정사상 가장 불행한 날"이라고 논평했다.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헌정사상 가장 불행한 날은 노태우 등 신군부가 국민의 군대로 광주 시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던 1980년 5월 18일이고 그가 구속된 날은 헌정사상 가장 불행한 날이 아니라 가장 다행스러운 날이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이후에도 우리 헌정사에 다행스러운 날이 가끔은 있었다. 그 중 하루가 지난 23일일 것이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희생양으로 사법살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법원이 30년 만에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 다행스러운 인혁당 사건 판결
이번 무죄 판결은 한 독재자의 장기집권의 야욕 때문에 무고하게 죽어간 희생자들과 간첩의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속에 오랜 세월을 눈물 속에 살아온 희생자 가족을 때늦었지만 명예 회복시켜 줬다는 점에서, 나아가 사법부가 유신 이후 군사독재의 시녀가 되어 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낸 어두웠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기교정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러기에 어느 면에서는 인혁당 사건의 장본인인 박정희 정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는 한나라당까지도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진 것이 큰 다행이며 이 사건으로 고인이 된 분들의 명복을 빌고 또 한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공식논평을 발표했다.
석연치 않은 것은 박근혜 전 대표의 태도이다. 박 전 대표는 이 사건의 장본인인 박 전 대통령과의 특수한 관계라는 면 때문만이 아니라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큰 한나라당의 유력 대권주자라는 점에서 판결에 대한 그의 입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실망스럽게 대응하고 있다.
법원이 이번 사건의 재심을 허용해 무죄판결을 내리게 되는 데에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자체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이 고문을 통해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한 것이 큰 힘이 됐다.
그러나 이 같은 국정원의 발표에 대해 박 전 대표는 당대표 시절 "증거는 없지만 정황이 그렇다는 식"의 발표로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반발한 바 있다.
또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것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이 발언은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인 것으로 위원회 발표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던 유가족들의 가슴에 다시 못을 박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법원의 무죄판결이 나자 유가족들은 박 전 대표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측근을 통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딸에게 책임을 물리냐"며 불쾌감을 표시하며 대응을 피하다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법원이 결정한 거 아니에요"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언론은 전하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같은 당의 홍준표 의원이 "박 전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공과 중 공만 안고 가면 안 되고 과도 반성하고 안고 가야 한다"며 "과로 분류되는 부분은 국민에게 사과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사과를 촉구했다.
또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은 인명진 목사도 재심판결이 내려졌으니 "국민들이 박 전 대표의 생각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박 전 대통령의 딸이래서가 아니라 차기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박근혜 전 대표 유감 표명해야
홍 의원과 인 목사의 지적 속에 이미 답은 나와 있다. 박 전 대표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정치인으로 발전하고 대통령이 되어 이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아버지를 넘어서 인혁당과 같은 아버지의 잘못은 과감하게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해야 한다.
또 아버지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집착에서 생겨난 모함 발언에 대해서도 유족에게 사과하고 똑같은 잘못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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