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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뷰] '인혁당 변론' 인권투쟁 40여년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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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뷰] '인혁당 변론' 인권투쟁 40여년 한승헌 변호사

입력
2007.01.2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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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韓勝憲) 변호사. ‘인권변호사’라는 별칭이 그만큼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40여년 간 권력의 탄압을 받은 지식인과 정치인, 억압의 시대를 헤쳐간 재야 운동가의 변호인석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그는 투사였다. 법정 안팎에서 스스로 불의에 맞서면서 시대정신과 민주주의를 웅변했다. 그래서 그가 걸어온 변론의 궤적은 고스란히 민주화 투쟁과 인권운동사의 증언이 되고 역사가 됐다.

그는 ‘지면서 이기는’ 변호사였다. 무죄를 주장했지만 유죄를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다시 무죄로 판명이 났다. 최근 무죄가 선고된 인민혁명당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사법부의 질곡을 온몸으로 부딪친 사람도 드물다. 26일 한 변호사가 고문으로 일하는 법무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인혁당 재심 판결 및 6월 항쟁의 의미, 법조계 현안에 대한 의견 등을 들어봤다. 그는 한결같이 역사와 국민 앞에서의 법조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당략에 치우친 정치권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_지난해 말 ‘한승헌 변호사의 변론사건 실록’을 펴냈습니다. 실록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있습니까.

“실록에는 제가 40년 동안 변호한 시국사건, 정치적 사건의 재판기록이 망라돼 있습니다. 지난날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국민적 저항의 실상이 담겨있는 사료(史料)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검찰과 사법부가 집권세력의 눈치를 보며 억압에 협력하던 시절, 법정도 유죄판결의 공장이었습니다. 정의와 불의가 뒤바뀐 그 시대의 부끄러운 판결을 법정 밖으로 끌어내 역사의 재심을 받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실록을 냈습니다. 법정에서의 직분도 중요하지만 사건의 진상을 국민과 역사 앞에 제대로 알리는 것도 법조인의 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_23일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에게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32년 전 이 사건의 변호를 맡았는데.

“늦게나마 참으로 다행스러운 판결입니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영령들이 되살아날 순 없겠지만 이들이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시 경북대생 여정남군의 변호인이었습니다. 대통령 긴급조치의 위헌성과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임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대법관들조차 묵살하더군요. 1975년 4월 9일 새벽, 여정남군을 포함한 8명의 사형이 집행되던 그 시각에 변호인인 저 역시 반공법 위반으로 묶여 들어가 같은 구치소에 있었습니다. 여정남군이 형장으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잠자고 있었습니다. 피눈물 나는 일이었습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누구 한 사람 사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이름이라도 밝혀내야 합니다. 수사와 소추, 재판을 맡았던 사람들은 반성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_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6월 항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87년 6월 항쟁은 이른바 운동권 내지 반정부세력 외에 각계의 시민들이 참여함으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의사와 교직원이 나섰고 변호사도 거리 시위를 했습니다. 기관차만이 아니라 객차나 화차까지 함께 가야 일이 성취된다는 이치를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의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했습니다. 저항하고 싸울 때는 하나였지만 싸움이 끝난 뒤에는 갈라지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지요. 비단 과거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권이 하나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성해야 합니다. 6월 항쟁이 민주주의 쟁취에 큰 의미가 있었다면 2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선 역사의 역주행을 막을 수 있도록 국민의 민주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_민주화 세력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최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과거 반독재 투쟁에 나선 민주화 세력은 말하자면 전시(戰時)체제를 이끈 주력부대였습니다. 문제는 일정 부분 성취하고 난 뒤의 ‘전후 처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대통령과 소수의 정치인을 빼고 민주화 세력은 평시 체제의 주력부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행정 경험과 전문성이 없어서지요. 민주화 이후 국민들의 기대와 욕구도 커졌습니다. 난국을 헤쳐나갈 정책이나 돌파력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를 마치 민주화 세력 모두의 실패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_법조계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법조 3역이 최근처럼 으르렁거린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까지 지낸 법조계의 원로로서 현 법조계의 갈등을 어떻게 보십니까.

“법원 검찰 재야법조 간에는 어느 정도의 긴장과 갈등 요인이 항상 잠재하기 마련입니다. 직분의 차이가 있는데도 관계가 원만하다면 이상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이상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법원 검찰 사이의 갈등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과거 법원 검찰이 독재정권에 순응할 때에는 기관 간의 대립도 없었습니다. 잠재적인 갈등 요인이 한 번쯤 드러나 공론화를 거친 뒤 새로운 해결의 틀로 전환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갈등이 직역 이기주의에 치우쳐 감정적 대응으로까지 번지는 것은 자제해야 합니다.”

_판사가 재판 당사자에게서 석궁으로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아무리 판결에 불만이 있더라도 석궁 테러와 같은 계획적 범행을 정당화해선 안 됩니다. 일부에서는 ‘오죽 했으면 그랬겠느냐’ ‘사법불신이 원인이다’는 동정론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법보다 주먹이 가까워도 좋다’고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다만 법원도 불신 요인을 항상 성찰해야 합니다.”

_사개추위가 만든 법안들이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어렵게 마련한 사법개혁안이 또 좌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합니다.

“사법개혁 법안들은 사개추위가 지난 2년 동안 범국민적인 논의를 거쳐 마련한 것입니다. 정치적 쟁점이 될 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민주화 수준에 걸맞은 선진화된 사법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막상 정치권을 대해보니 일부 야당 의원들이 ‘묻지마’ 식으로 거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현 정권의 치적이 될 만한 것은 협력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막막했습니다. 여당의 사정도 말이 아니다 보니 기댈 곳이 없습니다. 지난해 말 사개추위가 해산할 때 저는 호소했습니다. 제1 야당에서 성의를 좀 보여달라고. 국민에게 크게 이익이 되는 법안이 정략에 휘둘려 외면당하는 일이 절대 일어나선 안됩니다.”

_차기 정권에서 사법개혁을 주도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는데.

“사법개혁은 10년 이상 끌어온 국가적 과제입니다. 사개추위가 마지막 구간을 달린 주자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사법개혁안에 대해 야당이 발목을 잡는다고 해서 저는 야당을 찾아가 그들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설명하고 설득하고 간청했습니다. 사법개혁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정부 여당이 힘이 있어서 그렇게 됐다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야당이 의연한 자세로 국정을 대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2월 임시국회에서 여야가 좀 더 장기적인 안목, 국가적인 안목으로 꼭 처리해 주길 바랍니다.”

_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시행될 경우 일부에선 비싼 학비 때문에 경제형편이 넉넉한 사람만 법조계로 진출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현행 사법시험 제도는 수험도서만 몇 권 부해도 합격이 가능하도록 돼 있습니다. 고시촌 식의 공부만으로 법조인이 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로스쿨 도입이 거론된 것입니다. 대학 학부 졸업자가 로스쿨에 들어가 법조인의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3년 동안 여러 분야를 공부하고 실무 교육도 받게 됩니다. 법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로스쿨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설립 인가 때 장학금 규정을 마련했는지를 심사대상으로 정해두었습니다. 실력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 로스쿨을 못 다닌다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여 장학금, 특별 전형제, 등록금 감면제 등도 함께 시행할 것입니다.”

_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법의 정신이 있다면.

“과거 잘못된 판결은, 물론 집권자의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거기에 협력한 법조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무릇 법조인은 정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해야 할 기본적인 사명을 지닙니다. 법조인은 민주주의의 보증인으로서 자기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법의 이름을 빌어 권력에 영합해서는 안 됩니다.”

▦전북 진안 출생(73)

▦전주고ㆍ전북대 졸업 ▦고시 8회

▦경력

1960년 검사 임용

65년 변호사 개업

72년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 이사

75년 필화 사건(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77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집행위원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94년 김대중선생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 공동위원장

98년 감사원장

2002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

▦주요 변론 내역

동백림간첩단 사건(1967년)

통일혁명당 사건(68년)

김지하 시인 <오적> 사건(70년)

유신반대 야당의원 구속 사건(73년)

긴급조치4호 민청학련 인민혁명당 사건(74년)

이병린 변호사 구속 사건(75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80년)

부천서 성고문 재정신청 사건(86년)

보도지침 폭로 사건(86년)

6월항쟁 사건(87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89년)

전대협 임수경 양 방북 사건(89년)

작가 황석영 방북 사건(93년)

김지성 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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