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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10년 위기를 이겨낸 사람들] <7> 박공안 웅빈테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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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10년 위기를 이겨낸 사람들] <7> 박공안 웅빈테크 사장

입력
2007.01.2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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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새벽 2시. 서울 용산전자상가 끄트머리의 작은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다. 3평 남짓한 비좁은 공간 에서 박공안(47) 웅빈테크 대표가 컴퓨터와 씨름 중이다. 온라인 마켓에 올릴 제품 사진을 찍고, 설명문을 쓰고, 홈페이지에 오른 고객의 질문에 답글을 다느라 자정을 훌쩍 넘겼다. 피로를 숨길 순 없지만 눈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요즘 고객들은 정말 깐깐하다.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배송물품을 직접 포장하느라 손에 까맣게 때가 앉아 있지만 박씨는 몇 해 전까지 잘나가는 ‘사장님’이었다. 그의 회사는 130평 널찍한 매장에 직원이 14명이나 돼 용산에서도 제법 큰 축에 속했다. 그러나 1997년 IMF 한파는 박씨의 회사를 비켜가지 않았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환율이 오르자 컴퓨터 부품을 수입해 되파는 박씨의 회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사업은 마약 같았다. 적자가 쌓여 갔지만 청춘을 바친 회사를 차마 정리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IMF 이후 1년은 그나마 정부의 ‘국민인터넷PC 보급사업’ 덕분에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이후 자금압박은 심해졌고 사채까지 끌어 썼다. 그렇게 6년을 버텼지만 2003년 7월 최종부도가 났고, 모든 게 바뀌었다. 믿었던 거래처는 등을 돌렸고 ‘형님, 아우’하던 사람들까지 그를 고통으로 내몰았다. 이내 길바닥으로 내몰렸다.

그는 “노숙 생활에 익숙해져 편안하게 느껴지는 게 가장 위험하다”고 말했다. 서울역 생활이 몸에 밸 무렵인 2004년 봄 박씨의 눈 앞에 한 중학생이 지나갔다.

그 모습은 박씨를 30여년 전의 아련한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중3때,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든 채 무작정 기차를 타고 고향인 전북 고창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레스에 손가락이 5개 잘려나가는 공장 생활 뒤 23살이 돼서야 야간 공고를 졸업하던 일, 낡은 트럭에 전자부품을 싣고 전국을 떠돌던 기억이 차례로 스쳐갔다.

다음날 바로 용산으로 돌아와 좌판을 차리고 컴퓨터 소모품을 팔기 시작했다. 예전 알던 사람들은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지나치거나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박씨는 “자존심은 빚을 갚고 난 뒤 찾아도 된다면 이를 악 물었다”고 말했다. 좌판을 하면서 재기를 꿈꾸며 시장의 트렌드를 살폈다. 그리고 온라인 유통업에 눈을 뜨게 됐다. 이듬해 시작한 웅빈테크는 옥션 등 온라인사이트를 통해 월 1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다. 박씨는 “월 매출이 전성기 때의 2%에 불과하지만, 다시 일어섰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하루 20시간 가까이 일에 매달려 살면서도 박씨는 ‘한국컴퓨터소프트웨어팬매업협동조합’ 결성을 추진 중이다. 용산 상인들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고 사기꾼이라는 뜻의 ‘용팔이’로 불리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취지다. 박씨는 “온라인거래 비중이 높아지는 현실에서 자정노력을 늦춘다면 용산은 결국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고 몰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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