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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제비를 기르다' 이내 삶은 어찌도 이리 시퍼런 탱자와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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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제비를 기르다' 이내 삶은 어찌도 이리 시퍼런 탱자와 같으냐

입력
2007.01.2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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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 윤대녕 지음 / 창비 발행ㆍ320쪽ㆍ9,800원

신파가 없는 삶은 가난하다. 때때로 우리는 신파의 힘으로 남루한 생을 견딘다. 그러나 당사자에겐 늘 신화적인 그 신파는, 너무 극적인 것은 값싸다는 현대소설의 미학과 부딪치며 삶과 소설의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벌린다. 어느덧 신파는 소설의 금기이고, 그것이 소설적인 것을 비소설적인 것으로 축출하는 이 시대 신파의 운명이다.

생의 비의와 맞닥뜨린 자의 내면을 감성적인 문체로 그려냈던 소설가 윤대녕(45)씨가 3년 만에 새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 를 냈다. 단편 미학의 전범을 보여주는 ‘잘 빚어진 항아리’등 8편의 중ㆍ단편이 신파적 일상을 신화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가의 힘에 탄복케 하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겠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은 대부분 고독을 팔자로 타고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동시에 지키지 못한 약속이 남긴 상처와 회한에 대한 만가이며,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자들과 함께한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또 수년 후에나 받게 된 망자의 편지(<낙타주머니> )나 오랜 헤어짐 끝에 다시 돌아온 집 벽에서 발견한 아내의 낙서( <못구멍> )처럼 뒤늦게 하는 애달픈 구원의 요청이기도 하다. 편편이 아름답고 곡진하지만 <탱자> <못구멍> <제비를 기르다> 는 그 중 유별나다.

평생 박색(薄色)으로 서러웠던 고모의 일생을 그린 <탱자> 는 열여섯 고모와 절름발이 교사의 야반도주를 신화의 차원으로 구원한다. 칠칠치 못해 집안의 부끄러움이었던 고모는 가정방문을 왔다 절뚝거리며 돌아가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못난 자기를 보고 “병신처럼 계속 절룩거리며 걷지 말고 차라리 내 등에 업혀 함께 어디든 가자”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배추밭에 주저앉아 흐느끼던 남자는 그러나 일생을 함께 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고모는 탱자가 익으면 찾아오겠다던 옛 남편을 기다리며 평생 친정의 부엌데기로 종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고모의 이 신파적 생애는 한 인간의 생을 주축하는 게 결국은 슬픔이라고, 슬픔의 힘으로 이 신산한 생애를 버텨낸다고 울먹이며 중얼거린다. 폐암 선고를 받은 고모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옛 남편에게 “다시 합쳐 살자”는 말을 듣고 “발밑에 구르는 돌멩이를 주워 냅다 집어던지고 돌아”설 때, 탱자가 회수를 건너면 귤이 된다는 말을 좇아 중년의 조카가 늙은 고모에게 새파란 여름귤을 서리해줄 때, 고모의 낡은 연정은 하나의 서러운 신화가 된다.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 생의 한 단면이 아닌 전체를 조망한다. 만나고 헤어지고 기다리고 다시 만나기까지가 짧아도 6년 6개월이다. 유장한 삶의 이력들을 구비구비 펼치고 압축하면서, 작가는 지키지 못한 약속이 남긴 회한들을 끝내 터뜨려 버린다.

<제비를 기르다> 의 아버지는 일년의 반은 영혼이 떠나 있는 어머니로 인해 고독에 병들었고, 그래서 ‘나’는 유전처럼 일찌감치 고독을 짊어졌다. 어느날 아버지의 젊은 작부 문희에게서 여성과 모성을 동시에 체험한 ‘나’는 성인이 돼 어머니처럼 고독한 문희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고독이라는 질병을 앓는 이들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애 주기를 통틀어 쌓이는 작고 작은 슬픔들. 그것이 쌓이고 쌓여 툭 하고 터지는 날, 우리는 <제비를 기르다> 의 ‘나’처럼 늙은 작부의 품에 통곡으로 무너질지도, <탱자> 의 늙은 고모처럼 깜깜한 배추밭 속에서 곡을 하듯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못구멍> 의 주인공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저마다 하나씩 가슴 속에 커다란 구멍을 갖고 사는 것이다.

작가는 “삶의 한가운데를 어두운 숲처럼 더듬더듬 관통하면서 나는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그리움을 자주 체험했다. 삶의 정체는 결국 그리움이었을까?”라고 작가의 말에 적었다. 흥륭한 글쓰기로 왕년의 윤대녕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까지 주는 이 소설집은 그가 90년대 작가가 아니라 2000년대 작가임을 기쁘게 깨닫게 한다. 오랜만에 두번, 세번 읽어도 아깝지 않을 책을 만났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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