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이 영어 강의를 적극적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카이스트(KAIST)를 비롯한 몇몇 대학은 아예 모든 수업을 영어로 강의할 것이라고 한다. 영어 강의 및 국제화가 대학 변화의 핵심 트렌드가 되었다.
이는 몇 년 전 고려대에서 시작된 '영강' 및 국제화 전략을 앞다투어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한국의 대학 캠퍼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마을'이 될지도 모르겠다.
● 캠퍼스를 영어마을 만드나
영어 강의가 아니더라도 학문 용어들의 대부분은 이미 영어여서 영어를 외면하고는 학문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몇 년 전 뜻있는 몇몇 학자들이 모여서 우리 학문의 정체성 확립과 발전을 위해서 '우리말로 학문하기'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 후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얼마만큼 결실을 거두었는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대학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영어로 학문하기'에 재생불능의 완패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너나없이 민족을 최고 이념으로 내세우는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영어 강의 열풍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별다른 반발이 없고, 교수들도 영강 시행의 무리함을 작은 목소리로 지적할 뿐 영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영어 강의라는 큰 바위에 한글사랑이라는 계란을 던질 엄두가 나지 않는 현실이다.
현재 대학에서의 영어강의는 문제가 많다. 가장 일반적인 문제점은 강의 내용의 부실이다. 교수나 학생 모두 영어가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학습 효과가 매우 낮아진다.
뻔하고 상식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한 교실에서 심도있는 학문적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음은 당연하다. 언어를 고급스럽게 구사해야 하는 특정 학문 분야에 따라서는 코미디 같은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강의 소통의 차원에서도 문제이지만 강의 준비의 차원에서도 문제이다. 다수의 교수나 학생이나 영어 준비를 하느라고 수업 내용을 충실하게 준비할 여력이 없어진다.
처음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이 과정을 겪어야 제대로 된 영어강의가 이루어진다고 변명을 하지만, 영어강의 연습 하느라 일반 수업이 희생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영어강의는 대학교육의 부실화를 넘어서 우리말의 빈곤을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 대학 사회는 가장 지적이고 창조적인 사유가 생산되는 공간이다. 지속적인 지적 사유의 표현을 통해서 언어는 발전한다.
조선시대의 지적 사유는 거의 한문으로 표현되었고, 한글은 단순한 생활언어였다. 고급한 지적 사유를 한글로 표현하려는 노력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한글은 아직도 고급한 지적 사유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서툰 면이 있는 언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고급한 지적 사유가 주로 영어로 표현되는 세상이 된다면 한글은 또다시 '언문'의 위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 대학교육 물론 사유의 빈곤 초래
물론 영어의 현실적 중요성은 크다. 국제어로서의 영어의 위상은 이미 공고하고, 국제화가 진행될수록 영어의 패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머지않아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어라는 강력한 무기를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대학사회 전체를 영어마을로 만들고 영어로 학문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클 수도 있다. 영어 강의를 많이 하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라는 생각은 비지성적이다.
이남호ㆍ고려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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