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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7> 눈에 거슬려도 따라야 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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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7> 눈에 거슬려도 따라야 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입력
2007.01.24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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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문자는 세계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문자체계다. 영어를 흔히 국제어라 이르지만, 세계 언어생태계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몫은 세계 문자생태계에서 로마문자가 차지하는 몫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로마문자야말로 진정한 국제문자다. 로마문자말고 제법 널리 퍼진 문자체계로는 러시아와 동유럽 일부 나라, 몽골 등지에서 쓰는 키릴문자, 이슬람권 일부에서 쓰는 아랍문자, 동북아시아에서 쓰는 한자가 있지만, 그 통(通)-문화적 보편성에서 로마문자는 이들 문자체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터키어 같은 아시아 지역 언어들을 포함해 로마문자는 지구의 이 구석 저 모퉁이 언어에 두루 쓰이고 있다. 문자체계를 갖추지 못한 언어를 새로 찾아냈을 때, 그것을 적는 것도 일차적으로 로마문자를 통해서다. 그러니, 로마문자를 쓰지 않는 사회에서도 제 언어의 로마자 표기법 문제를 피할 수 없다.

한국어를 로마자로 적는 것은 언뜻 보기보다 복잡한 문제들을 지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한국어를 음성 수준에서 베껴내느냐 음소 수준에서 베껴내느냐 형태음소 수준에서 베껴내느냐의 문제다. 여느 언어에서보다 특히 한국어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언어의 음성, 음소, 형태음소를 잇는 경사가 매우 급하기 때문이다. 이 세 수준에 얼추 대응하는 로마자 표기법이 각각 매큔-라이샤워식, 문화관광부식, 예일식이다.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은 1937년 미국인 조지 매큔과 에드윈 라이샤워가 고안했고, 예일식 표기법은 그보다 다섯 해 뒤 미국 군부의 위촉을 받아 새뮤얼 마틴이 만들어냈으며, 정식 이름이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문화관광부식 표기법은 2000년 7월7일 문화관광부 고시 제2000-8호로 공포됐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은 제2장 표기일람에서 로마자 표기의 기본 테두리를 제시한 뒤, 제3장에 이런저런 예외 규정을 두어 이를 보완하고 있다. 마틴이 고안한 표기법을 예일식이라 부르는 것은 마틴이 오래도록 예일대학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한국 바깥에서 가장 널리 쓰는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은 매큔-라이샤워식이지만 국내에서는 문화관광부식 표기법이 자리잡는 추세고, 나라 안팎의 언어학자들은 예일식 표기법을 쓴다. 언어학자들이 예일식 표기법을 쓰는 것은 그것이 한글 맞춤법을 베껴낸 형태음소 표기여서 그것을 한글로 고스란히 되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관광부식 표기법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이다. 공식 표기법으로는 해방 이후 네 번째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에 고시한 로마자 표기법을 1959년에 처음 고쳤고, 1984년 다시 고친 데 이어 2000년에 세 번째로 고쳤다. 문화부가 설치되기 전엔 어문정책을 문교부(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가 맡았던 터라, 지금 로마자 표기법 이전의 세 종류 표기법을 문교부식 표기법이라 부른다.

매큔-라이샤워식, 문화관광부식, 예일식이 한국어를 대략 음성, 음소, 형태음소 수준에서 적는 풍경을 대명사 ‘그것’의 표기에 기대어 살펴보자. ‘그것’을 매큔-라이샤워식은 kugot으로, 문화관광부식은 geugeot으로, 예일식은 kukes으로 적는다. 한국어 파열음과 파찰음 가운데 소위 평음(예사소리. ㄱ, ㄷ, ㅂ, ㅈ)을 로마자 k, t, p, ch로 적을 것인지, g, d, b, j로 적을 것인지는 까다로운 문제다.

이 소리들의 고유값은 /k, t, p, ch/에 가깝지만, 두 유성음 사이에선 /g, d, b, j/에 가깝게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것’의 첫 번째 /ㄱ/는 무성음인 데 비해, 두 번째 /ㄱ/는 유성음이다. 유성음 /ㅡ/와 유성음 /ㅓ/ 사이에 놓인 탓에, 무성음 /ㄱ/가 유성음으로 변한 것이다. 이 차이는 한국인들 귀에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여느 외국인들 귀에는 또렷이 들린다. 매큔과 라이샤워는 이 차이를 한국어 로마자 표기에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제 귀에 들리는 대로 적기로 했다. 그래서 ‘그것’의 첫 번째 /ㄱ/는 k로, 두 번째 /ㄱ/는 g로 적게 되었다.

그런데 이 표기법은 한국어에서 무성음 /ㄱ/와 유성음 /ㄱ/가 한 음소라는 점을 도외시하고 있다. 비록 환경에 따라 음성 수준에서는 달리 실현되지만, 한국어 화자들은 그 두 소리를 같은 소리로 인식한다. 한국어 화자가 같게 여기는 소리들을 서로 다른 문자로 적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문화관광부식과 예일식이 이 두 소리를 같은 문자로 적는 것은 이런 부자연스러움을 없애기 위해서다. 그러면 이 소리를 k로 적어야 할까 아니면 g로 적어야 할까?

예일식은 ‘ㄱ’의 고유한 소리값을 존중해 k를 골랐고, 문화관광부식은 체계를 고려해서 g를 골랐다. 체계를 고려했다는 것은 예컨대 ‘ㅋ’을 위한 자리를 고려했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식 표기법 고안자들은 알파벳말고는 다른 부호들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미리 정해놓은 터라, ‘ㄱ’을 k로 적기로 결정했다면 ‘ㅋ’을 어떤 문자로 적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이런 격음(거센소리. ㅋ, ㅌ, ㅍ, ㅊ)을 적기 위해 예일식은 문자 h를 덧붙이고, 매큔-라이샤워식은 어깻점을 덧붙인다. 그래서 ‘칼’을 문화관광부식은 kal로, 예일식은 khal로, 매큔-라이샤워식은 k'al로 적는다. 그러나 어깻점은 보기에 좀 지저분하다. 그래서 학술서적이 아닌 일반 출판물에선, 매큔-라이샤워식 표기법도 어깻점을 빼는 것이 예사다. 이것이 이른바 간이 매큔-라이샤워식이다. 그러니까 간이 매큔-라이샤워식에서는 ‘갈’과 ‘칼’이 구분되지 않는다. 한국인이 같게 여기는 소리(무성음 /ㄱ/와 유성음 /ㄱ/)를 k와 g로 달리 적었던 매큔과 라이샤워가 정작 한국인이 또렷이 구분하는 두 소리(/ㄱ/와 /ㅋ/)는 같은 문자로 적었던 것이다.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자. 이 낱말의 마지막 소리 /ㅅ/를 매큔-라이샤워식과 문화관광부식은 t로 적었고, 예일식은 s로 적었다. 귀에 들리는 대로 적는 것(표음)을 원칙으로 하는 매큔-라이샤워식이 이 소리를 t로 적은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논리적으로 일관돼 있다. /ㅅ/는 어말에서 /ㄷ/로 변하니 말이다.

한국어 형태음소론을 존중해 한글로 되돌릴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는 예일식이 이 소리를 s로 적은 것도 논리적으로 일관돼 있다. 형태음소란 같은 형태소에 속하는 음소 무리들(또는 이형태들)의 추상적 대표형(원형)을 뜻한다. 이런 이형태들에서 보이는 음소 교체 현상을 따져보는 분과가 형태음소론이다.

한국어 형태소 ‘그것’은 ‘그것은’에서는 /그것/으로 실현되고, ‘그것과’에서는 /그걷/으로 실현되고, ‘그것만’에서는 /그건/으로 실현된다. 다시 말해 /그것/ /그걷/ /그건/이라는 이형태들이 존재한다. 한글 맞춤법을 고안한 이들은 이 세 가지 이형태의 추상적 대표형(원형)이 {그것}이라 판단했고, 그래서 이 형태소가 환경에 따라 어떻게 실현되든 ‘그것’ 한가지로 적기로 결정했다. 예일식은 이런 형태음소론적 한글 표기법을 고스란히 전자(轉字)한 것이므로, ‘그것’의 마지막 소리를 s로 적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문화관광부식에서 ‘그것’의 마지막 소리를 t로 적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깔끔하진 못하다. ‘그것’의 두 /ㄱ/를 g로 통일했을 땐 전자(轉字) 원칙에 따랐다가, 그 어말음 /ㅅ/([ㄷ]로 실현되는)를 s도 d도 아닌 t로 적을 땐 표음(表音)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문화관광부식 표기의 큰 특징은 예일식 전자와 매큔-라이샤워식 표음의 절충에 있다. 이런 절충이 이론적으론 깔끔하지 못하다는 것을 문화관광부식 표기법의 고안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의 맨 마지막 항(제3장 제8항)은 “학술 연구 논문 등 특수 분야에서 한글 복원을 전제로 표기할 경우에는 한글 표기를 대상으로 적는다”고 규정함으로써, 예일식과 비슷한 체계를 허용하고 있다.

다음, ‘그것’의 모음 부분을 살피자. 될 수 있는 대로 모음 한 글자를 로마자 한 글자와 짝짓고 있는 매큔-라이샤워식과 예일식은 /ㅡ/와 /ㅓ/를 각각 u, o/ u, e로 적고, 그런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문화관광부식은 이 소리들을 eu, eo로 적는다.

정식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서는 /ㅡ/, /ㅓ/를 나타내는 u, o 위에 반달점을 덧대서 /ㅜ/, /ㅗ/를 나타내는 u, o와 구별하지만, 이 반달표 역시 어깻점처럼 학술 서적 이외 출판물에서는 빼는 것이 예사다. 그래서 간이 매큔-라이샤워식에서는 /ㅡ/와 /ㅜ/, /ㅓ/와 /ㅗ/가 구분되지 않는다. 간이 표기에서의 이런 혼동은, 한글로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더불어, 매큔-라이샤워식의 큰 약점으로 지적돼 왔다.

영어 철자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geugeot으로 적는 문화관광부식 표기가 몹시 거슬릴 것이다. 그러나 이젠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을 두고 벌여온 논쟁을 접을 때도 됐다. 부족한 점이 있는 대로 일단 정해진 것이니, 또 다른 ‘개정’의 미련은 버리고 이를 정착시켜 나가는 것이 좋겠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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