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관은 책과 노는 놀이터 조용하면 재미없고 지루하죠"
2001년 초 당시 일곱 살 큰 아이에게 읽힐 책을 골라 볼 생각으로 동네 도서관을 찾은 김은정(38)씨. 6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 도서관으로 출근하다 지금은 상근 일꾼으로 자리잡았다. 그가 도서관 손님에서 무보수 직원으로 변신한 계기는 '독서회' 활동이었다.
자녀의 독서교육을 위해 모인 엄마들끼리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엄마 스스로 책을 읽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엄마가 책을 잡으니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놀이터 삼아 책을 가까이 했다.
김씨는 아이 가르칠 욕심에 시작했던 독서지도사 교육과정도 그만두었다. 가장 자율적인 활동인 '독서'와 타인이 개입해 이끌어주는 '지도'라는 역할이 나란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던 2000년 동생을 따라 도서관을 처음 찾은 문 준(19)군. 고2 때까지는 공부를 못해 대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독서에 취미를 붙이면서 지금은 어엿한 물리학도로 성장했다.
문군은 "솔직히 애들하고 노는 게 좋아서 도서관에 계속 나왔을 뿐"이라며 "그런데 호기심 많은 아이들과 얘기하다 보니 어느 순간 물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문군은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학원 한 번 안 다녔는데도 고교 3학년 1년 동안 수능점수가 100점이나 올랐다"면서 "전공 과목은 모두 A+인데 나머지는 죄다 C+"라고 머리를 긁적였다.
크고 작은 아파트들이 빽빽이 들어선 경기 용인시 수지구의 한 상가건물 지하에 위치한 '느티나무어린이도서관'. 책을 통해 지역사회를 바꾸고 있는 도심 속 주민공동체다.
40평 남짓한 이 공간에서 책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도구가 아니라 같이 노는 장난감이자 친구이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이 곳이 '책 읽는' 도서관을 넘어 '문화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된 이유다.
도서관 같지 않은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느 도서관의 엄숙한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숨 죽이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과 어울려 한바탕 신명을 내는 모습이다. 책을 주제로 대화를 하고 논쟁을 벌이느라 시골장터처럼 시끌벅적거린다. 실제 이름만 '어린이도서관'일 뿐, 아장아장 기는 갓난 아이부터 초ㆍ중ㆍ고교생, 자녀와 함께 온 엄마 아빠, 손주를 안고 온 할머니까지 이용객이 다양하다.
한 쪽에선 30대 중반 엄마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책을 읽어준다. 옆에서는 책 읽기에 싫증난 아이들이 색종이를 오려 붙이며 논다. 구석에 있는 오두막 같은 방에서는 새 책을 주제로 작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종일 만화책만 잡고 있는 애들도 있지만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는다. 이 도서관을 만든 박영숙 관장은 "책 읽기를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변화는 놀라웠다. 책이라면 만화 <도라에몽> 과 <검정 고무신> 밖에 모르던 아이가 누가 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300쪽이 넘는 동화책 <마틸다> 를 읽고 친구들에게 줄거리를 줄줄 얘기해준다. 마틸다> 검정> 도라에몽>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며 울던 아이도 같은 반 친구들을 데려와 씩씩하게 책을 읽어준다. 박 관장은 "처음엔 '여기가 도서관 맞냐'고 하던 사람들이 '도서관이 이럴 수도 있구나' 하다가, 이제는 '도서관은 어디나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자랑했다.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난다
이 도서관에서는 크고 작은 모임이 수시로 열린다. 거창한 계획 아래 만들어진 모임들이 아니다. '이런 모임은 어떨까', '할 수 있겠는데' 싶어 시작한 게 하나 둘 늘어나 벌써 수십 개가 생겼다. 가장 먼저 생긴 모임은 엄마들의 '독서회'다.
박 관장은 "살림살이에 지쳐 수다떨기만 하던 아줌마들이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아이에게만 쏠렸던 관심이 '나'에게로 옮겨왔고, 누구의 엄마나 아내가 아닌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했다.
독서회 회원 김은정씨는 "평소 이웃집 엄마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말 속에서 경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게 없어서 좋다"고 했다.
매달 넷째 주 토요일에는 마을학교가 열린다. 해외 출장이 잦은 회사원, 동화작가, 색종이 접기를 배운 아줌마 등 엄마 아빠들이 교사로 나선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각자 준비한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전해 주는 방식이다.
"그건 왜 하세요", "앞으로는 뭘 할거에요"와 같은 아이들의 질문을 받으며 어른들 역시 배우는 게 많다고 한다. 이 밖에 매달 열리는 책 전시회, 작가와의 만남 등 문화행사와 어린이날 잔치, 마을축제, 작은 음악회 등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행사가 풍성하다.
"마을마다 느티나무 하나씩 생겼으면"
느티나무도서관이 아파트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은 '좋은 책'에서 나온다. 박 관장은 전문사서 2명의 도움을 받아 엄격하게 책을 고른다. 출판사가 홍보를 위해 공짜로 보내준 책도 내용이 좋지 않으면 서가에 배치하지 않는다. 좋은 책은 반드시 돈을 주고 구입한다는 원칙도 지키고 있다. 이렇게 고른 책들이 현재 1만6,500권에 이른다.
입 소문을 듣고 찾아온 회원이 벌써 1만2,000명. 사설 도서관 치고는 엄청난 규모다. 서울 학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수시로 찾아오는가 하면, 아예 수지로 이사를 온 경우도 적지 않다.
박 관장이 지난해 9월 펴낸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라는 책이 널리 알려지면서 '제2의 느티나무도서관'을 꿈꾸는 사람들이 1,000명 이상 견학을 하고 갔다. 현재 경기 용인에는 느티나무도서관과 비슷한 방식의 마을도서관이 5곳이나 생겼다. 운영자는 모두 이 도서관에 드나들다 근처로 이사 온 엄마들이다. 내>
이 곳에서 일하는 80여명의 도우미들은 '자원봉사'라는 말 대신 스스로를 '자원활동가'라고 부른다.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돕는 봉사가 아니라 서로 나누고 얻어 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 관장은 "책 읽는 아이로 키우려면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며 "전국의 마을마다 느티나무와 같은 도서관이 하나씩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ㆍ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글ㆍ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박영숙 관장 "책 읽기 강요는 책 빼앗는 교육"
흔히 도서관 관장이라고 하면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지 위해 근엄한 표정을 짓고있는 중년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데 느티나무어린이도서관 박영숙(41) 관장은 영락없는 이웃집 아줌마다.
며칠 전 도서관을 찾았을 때도 "뒤늦게 얻은 셋째"라며 간난아기를 포대기에 싸 들쳐 업은 채 일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연방 찾아오는 아이들을 반기는 모습이 여느 도서관장의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그는 "아이들 이름 제대로 기억하는 것 말고는 잘 하는 게 없다"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1년에 수십 차례 강연을 다니는 유명인사다. 어린이도서관과 마을공동체 문화 발전에 힘쓴 공로로 2004년 '독서문화상 문화부장관상', 지난해엔 국민훈장과 '미래를 이끄는 여성지도자상'을 받았다.
박 관장은 2000년 2월 어린아이를 업고도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누구에게나 열린 마을도서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6개월의 준비를 거쳐 느티나무어린이도서관을 열었다. 대학 시절 야학 경험이 큰 재산이자 용기가 됐다.
처음엔 학부모들의 냉대 탓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서관에 있는 아이들을 수시로 불러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도서관 지지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자녀들의 논술이나 내신 성적을 위해 책을 단지 필독 목록에 올리는 세태가 너무 안타깝다. 박 관장은 "부모가 책 읽기를 강요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면서 숙제나 시험에서 해방되듯이 책도 함께 버릴 것"이라며 "독서 이력이니, 인증이니 하는 방식의 독서교육은 결국 아이들에게서 책을 빼앗는 결과만 낳는다"고 강조했다.
이런 의미에서 느티나무도서관은 입시 위주의 책 읽기를 거스르는 독서운동의 구심체인 셈이다. 그는 "느티나무가 아이들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누구나 스스럼없이 찾아올 수 있는 '느슨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