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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우의 과학@영화.com] <4> 우리가 믿고 사는 것들 - 트루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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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우의 과학@영화.com] <4> 우리가 믿고 사는 것들 - 트루먼쇼

입력
2007.01.2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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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루먼 쇼> (피터 위어 감독, 1998)의 주인공은 평범한 샐러리맨 트루먼 버뱅크. 사랑하는 아내 메릴과 오순도순 살림을 꾸리고 있는 보험맨이다. 물도 무서워하고 하늘을 나는 것도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투루먼은 나고 자란 고향 씨헤븐을 떠나 보지도 않았고 떠날 생각도 없다. 다만, 대학시절 만났던 첫사랑 로렌이 떠나갔다는 피지에 언젠가 한 번은 가보겠다는 꿈은 제법 강렬하다. 서른이 되기까지 삼십 년간 트루먼의 생활은 순탄했고 나름대로는 행복했다.

진실을 밝히자면, 트루먼은 방송국이 입양해서 키운 아이다. 트루먼은 방송국에서 마련한 씨헤븐이라는 세트에서 자란 것이다. 트루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배우라는 사실을 자신만 모른다. 그리고 씨헤븐에 사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숨겨진 카메라에 잡혀 방송을 타고 만인에게 공개된다. 트루먼이 엑스트라로 투입됐던 로렌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예기치 않았던 일. 프로듀서들은 로렌을 세트장에서 빼내어 트루먼에게 아련한 그리움을 마음 속에 품게 만든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잘 짜인 각본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트루먼은 두려워하는 물을 건너 세트장 바깥으로,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다.

흔히 이 영화는 도처에 널려 있는 감시 장치에 얽매여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주는 경고로 인용된다. 하지만 내겐 이 영화가 ‘우리가 믿는 것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남아있다. 우리는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무언가 한 축만 넘어지면 모두가 왕창 깨져버리는 진실을 믿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들이 머리 속을 맴돈다.

배워서 알고 믿었던 것들이 깨지는 소소한 경험들은 누구나 할 것이다. 어릴 적 학교에는 늘 혼분식을 강조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선생님은 도시락 검사를 했다. 건강을 위해서라고 했다. 쌀은 영양학적으로 아주 불완전한 식품이라고 했다. 서양 사람들이 키가 큰 이유는 밀가루를 많이 먹어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어느 날 정치적 압력 때문에 쌀이 그다지 좋은 음식이 아니라고 했다는 고백을 TV를 통해 보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쌀이 남아도는 요즈음은 쌀이 좋다는 선전이 한창이지만 별로 믿기지 않는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을 과학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이야 매일 아침 신문에서도 접하는 것이라서 새삼스러울 것 없기는 하다. 만병통치약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희한한 기구들도 자주 눈에 띈다. 이젠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다. 그런데 허구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늘의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트루먼이 받은 것과 비슷한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까?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 주장은 흔히 이해하듯이 단순하게 지구와 태양의 위치만을 바꾼 사건은 아니었다.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그 당시까지 2000년 동안 사람들이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뒤집어야 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 모든 것의 운동을 태양이 지구 주위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에 맞추어 놓았다. 물체를 이루는 근본적인 단위는 물, 불, 흙, 공기라는 네 가지라고 생각했고, 만물은 그 네 가지가 적당하게 섞여 있는 것이라 믿었다. 네 가지 성분이 섞인 비율에 따라 물체의 성질이 정해진다. 예를 들어, 흙이나 물과 같이 본질적으로 무거운 성분을 많이 함유한 물체는 우주의 중심인 지구 중심 쪽으로 운동을 한다.

반대로 공기나 불과 같이 가벼운 성분을 많이 가진 물체는 우주의 중심인 지구 중심에서 멀어지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천체들은 아홉 겹의 수정구에 박혀 지구 주위를 돈다. 지구의 물질은 물, 불, 흙, 공기 이지만 천상은 천상의 물질이라 불리는 제5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일정한 운동만을 반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거치면서 2000년간 약간씩 가해진 변형을 제외하면 온전히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이라 믿었던 설명들이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꾸면 완전히 무너진다. 우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면 지구의 물질들과 천상의 물질들을 구분할 기준이 없어진다.

지금까지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원소라 믿었던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우주의 중심이 아닌 지구의 중심을 향해 무거운 성분을 많이 가진 물체가 떨어질 이유도 없고 그 중심을 벗어나려고 가벼운 성분의 많은 물체들이 발버둥 칠 이유도 없다. 코페르니쿠봉?주장이 맞는다면 세상이 어떤 것들로 구성되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운동한다고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상황.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받은 충격이 트루먼이 받은 충격보다 작았을까?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바꾸어 놓은 사람들은 새로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설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물체를 구성하는 분자와 원자, 그리고 그 아래 놓인 아원자의 세계를 밝혀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물체들의 근본적인 구성부터 다시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물체와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밝혀 물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데도 여전히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설명해야 했다. 수정구가 없어진 우주에서 천체의 운동을 지구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원리를 적용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세상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리인가? 우리는 진리의 세상으로 나왔다고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세트로 넘어온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근대과학이 시작된 지 300년이 넘었고, 그 속에서 잘 짜인 설명의 틀을 만든 우리가 현대과학의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무엇 하나 삐끗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질 가능성이 있다. 굉장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현대 과학이 이렇듯 인식론적으로 허약한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곧잘 잊곤 한다.

주일우 (과학평론가ㆍ문지문화원 ‘사이’기획실장)

■ 근대 이전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

서양 학문의 개론서에서 거의 빠짐없이 할아버지로 거론되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기원전 4세기 사람인 그는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삶을 아테네에서 보냈다. 그는 물리학, 시학, 연극, 생물학, 미학, 화학, 기상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행정학, 윤리학 등 넓은 범위에서 학문을 연구했다. 천문학과 기하학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앞서 체계를 갖추었던 학문 분야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가 연구했던 다른 수많은 개별 학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비로소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가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견해가 오랫동안 많은 분야를 지배했다. 천문학의 프톨레마이오스, 의학의 갈레노스와 같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정교한 이론 체계를 세울 때도 기본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밑바탕에 깔았다. 서양 중세의 기독교 세계에서도 성경의 견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과 결합시켜 세상을 설명했다. 교회의 권위와 더불어 이러한 설명이 힘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 흔히 과학에서 근대 이전의 과학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을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가 했던 작업들이 중요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배열과 순서가 바뀌었다고는 해도 그가 밝힌 사실들 중에서 유효한 것들이 여전히 많고 그가 학문을 한 방법의 뛰어난 측면들도 계속해서 새로이 조명을 받고 있다. 과학의 인식론적인 취약성은 인간의 한계를 반영한 것이지만 그것이 과학의 가치를 바래게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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