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製藥)업계가 연거푸 떨어지는 날벼락에 좌초위기를 맞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연말 건강보험 재정에서의 약제비(藥劑費) 지출 비중을 떨어뜨리고 국민들에게 효능 좋고 값 싼 약을 공급한다는 목적으로 도입한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의약품선별등재 방식) 때문에 몇몇 대형 제약사를 제외한 군소업체들이 폐업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대형 다국적 제약사들의 입지를 더욱 넓혀 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막바지를 향해 달리면서 이러한 위기감은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약사의 살생부, 포지티브 리스트
“현실이 심각하게 비치지 않게 하려고 제약사들이 꼭꼭 숨겨서 그렇지 업계가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 이상이다.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통해 낙오되는 업체들이 얼마나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한 중견 제약사 임원이 들려 주는 제약업계의 상황이다.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시행함으로써 현재 2만2,000여품목의 건보 적용 의약품 수가 2011년까지 5,000~1만여 품목으로 줄어든다. 가격과 효능이 떨어지면서도 건보에 등재돼 약값부담을 주는 품목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는 게 정부측 설명이지만 제약사들은 다르게 본다. 문경태 한국제약협회 부회장은 “약제비 비중 증가 원인은 약값이 올라서가 아니라 인구의 고령화로 약 소비량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등재 품목을 줄여도 국민들의 약값부담이 해소되지 않는다. 제네릭(신약의 특허기간이 끝난 후 같은 성분으로 동일한 효능을 내도록 만든 복제약) 약품 생산에 매달리고 있는 군소 제약사들은 언제 포지티브 리스트의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지 몰라 떨고 있다.”고 말한다.
업계의 우려는 현실화하고 있다. 국내 시장에 약을 판매하지 않고 외국에 주로 수출을 하는 A제약사는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으로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했다. 복지부의 최근 고시(告示)에 따르면 연내에 국내에서 생산된 적이 없는 의약품 4,000여개가 건보에서 밀려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 보이지 않는 위협
제약업계는 한미 FTA 의약품분과 협상이 결국 미국 측의 요구대로 결론 내려질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 입장에선 한국의 의약품 시장이 중국 동남아 등 거대 시장을 열 수 있는 빗장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반면, 우리에겐 국내총생산(GDP)의 1.4%에 불과한 소형 산업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FTA 의약품 분과 요구사항은 크게 3가지다. 신약 특허기간의 연장, 최저가격제의 도입, 약가 협상에서 자국 입장을 대변해 주는 대화통로의 확보다. B제약사의 한 관리직 사원은 “미국 요구대로 된다면 230여개의 국내 제약사 중 살아남을 곳은 거의 없다”며 “신약의 특허기간이 늘어나는 만큼 국내 제약사의 제네릭 시장 진입 시기가 늦어져 매출 손실이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업계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첫 해에 제약산업 매출 성장률이 5%, 2년째에 3%로 떨어져 9,600억원 정도의 매출손실이 생길 것으로 내다본다.
살길은 연구개발, 정부는 미온적
이병규 유한양행 중앙연구소장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국내 제약산업가 시장을 외국사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적어도 매출의 10%정도를 연구개발에 투자해서 신약 개발을 독려해야 한다” 며 “하지만 국내사들의 전체 평균 연구개발 투자비율은 4%대에 그치고 있는 실정” 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업체 중 연구개발비의 비중을 그나마 5%대로 유지하는 회사는 상위 5개사 정도에 그치고 있다.
제약업계는 연구개발 강화에 동의하면서도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기가 죽는다는 대답들이다. 제약협회 한 관계자는 “추진방향 발표에서 시행까지 7개월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졸속으로 만들어진 게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 도입 등 약제비 적정화 방안” 이라며 “굳이 한미 FTA 협상과 맞물리는 시기에 시행하는 속내를 모르겠다”고 섭섭해 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 도입 후 위기에 몰린 제약업계를 돕기 위한 후속 대책을 마련 중” 이라고 말했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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