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성스러워 보였다. 아니, 지독하다는 표현이 맞았다. 온몸을 파고드는 한겨울 길바닥 냉기(冷氣)를 그들은 며칠째 꾹 참고 있었다. 비닐과 이불로 바람을 막고 얇은 골판지 위에 몸을 누운 채 1만원권 새 지폐를 손꼽아 기다리던 사람들이다. 줄지어 빽빽하게 늘어선 행렬은 어림잡아도 100m가 넘었다. 21일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화폐 교환창구 앞에 모인 사람들의 속내를 들었다.
행렬 맨 앞에는 이순근(50)씨 가족이 있었다. 이씨는 부인, 대학생 아들 딸과 함께 18일 오후10시께 왔다고 했다. 22일까지 무려 나흘 밤을 온 가족이 거리에서 지새는 셈이다. 다른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지만 정작 이씨는 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난해 5,000원권 새 돈은 늦게 가서 놓쳤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한달 전부터 가족 모두가 일찍 오겠다고 마음먹었죠.”
이씨는 경기 성남시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지만 잘 안돼서 걱정이라고 했다. 이변(?)이 없는 한 그는 일련번호가 ‘0010001’번부터 시작하는 돈 묶음을 손에 쥔다. 경매를 거치지 않고 시중에 풀리는 가장 앞선 번호로, 당장 팔아도 10배 가까운 이윤을 남길 수 있다고 한다. 이씨는 “새 돈은 우리 가족에게 새해 선물이나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그 뒤에는 정모(36)씨가 있었다. 근처 고시원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정씨는 19일 오전2시30분께 혼자 왔다. 그는 “공부도 잘 안되고 자꾸 잡생각만 나서 돈이나 벌까 하고 왔다”며 “집에서는 아들이 이러고 있는 줄 모른다”고 씁쓸해 했다.
줄담배를 피우며 한참 뜸을 들이던 정씨는 “돈도 좋지만 사람들이 좀 심한 것 아니냐”는 기자의 말에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력한 만큼 갖는 거잖아요. 이렇게 몸 상하면서 있는 것도 정당한 노동인데 누가 뭐랄 것 있답니까.”
행렬 중간에는 수더분한 인상의 아저씨 5명이 모여 있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한 동네에서 장사를 하는 이웃이라고 했다. 바지 속 종아리에는 22일 신권으로 바꿀 1만원권 100장이 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최병규(53)씨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지난해 5,000원 신권 열풍을 보고 집에 있으면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같이 온 박영두(52)씨는 “나중에 큰 돈이 되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사흘 동안 노숙하러 간다는 말에 가족들은 유별나다며 잔소리를 했지만 벌써 마음이 든든하다”고 거들었다.
수시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사람들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대신 줄을 서주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모 대학 경호학과 진학을 앞두고 있다는 김모(21)군은 “하루 10만원씩 사흘 동안 30만원을 받기로 했다. 여기에 식사 사우나비 소줏값도 대준다.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일이라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옆에는 함께 온 친구 3명이 더 있었다.
22일 아침 이곳에서 교환하는 신권은 모두 2만장. 1인당 한도는 100장이니까 200명 뒤에 있는 사람은 헛수고인 셈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행렬은 계속 늘었다. 아들(25) 며느리(25)와 함께 250번째에서 자리를 펴던 전모(62)씨는 못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는 일이잖수. 그래도 좀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텐데…”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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