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0일자 이 칼럼에 <언론인 노무현> 이라는 글을 썼다. 노 대통령은 정치를 하기보다 언론인이 됐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내용이었다. 언론인>
독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첫째, 말도 안 된다, 그랬다면 언론계가 엉망이 됐을 것이다, 사사건건 고개 쳐들고 선배에게 대들거나 취재지시를 어기고 엉뚱한 짓을 하다가 제풀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둘째, 그 사람 이야기 좀 그만 써라, 지겹다, 술 취한 사람의 주정을 받아주면 갈수록 더 한다…. 그러나 또 쓰지 않을 수 없다.
● '죽치고 앉아서 담합'이라니
노 대통령이 16일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담합'한다고 말하자 "이젠 젊은 기자들과도 싸우느냐"고 혀를 차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대통령은 다음 날 중앙언론사 편집ㆍ보도국장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수동적 취재행태, 소위 발표저널리즘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이 있어서 했던 얘기"라고 해명하며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미안해 하지 않는 것 같다. 복지부장관과 홍보수석이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유감을 표명했고, 자신은 나중에 추인했다는 말에서 그런 짐작을 하게 된다.
'죽치고 담합'발언은 당사자인 보건복지 담당 기자들과 기자협회 등의 성명이 지적한 대로 사실 파악도 잘못된 내용이었다. 그런 기자실 풍경은 1980년대, 5공화국 시절에 언론자유의 한계를 핑계 삼아 기자들이 담합구조의 틀 속에 안주했던 상황의 모습이다.
노 대통령이 아무리 컴퓨터와 인터넷에 밝고 멀티 태스킹에 능하다 해도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사람을 통해서 잘못된 정보와 보고를 얻었을 수도 있다. 누가 그렇게 입력했는지 몰라도 중대하고 심각한 오류였다. 최고 결정권자의 바른 판단을 돕고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장관과 참모들이 해야 할 일은 참 많다.
그러나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대통령의 표현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보스의 표현방식, 어휘 선택에 부하가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동반자라는 사람조차 그런데 어느 누가 바른 말을 할까. 고건 전 국무총리와 '실패한 인사'발언 공방을 할 때, 노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에게 "할 말 있으면 계실 때 많이 해달라"고 말했다. 끝나고 뒤돌아서서 (고 건 전총리처럼 나를) 욕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노 대통령과 같은 사람에게 제 자리에서 말하기란 쉽지 않다.
대통령을 옹호하기 위해 어느 비서관이 쓴 글의 요지는 이렇다. 정부정책을 비판하더라도 관성에 따른 비판이 아니라 다각적 취재와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해달라는 것, 지금 언론에 필요한 것은 정부로부터의 언론자유가 아니라 잘못된 관행과 타성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노무현행정부 시절에만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살펴보면 우리 언론은 문제가 많으며 편이 갈려 무조건적 비판을 하는 데만 익숙하다. 예를 들어 '죽치고 앉아서 담합'의 당사자들이 낸 성명은 '보건복지 담당 기자 일동' 명의로 돼 있다.
'보건복지부 출입'이라는 말에 담긴 고정성 의존성 획일성 폐쇄성 배타성(그리고 담합성!)을 경계한 표현인데, 언론 보도에서는 이런 노심초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사려와 분별이 모자란다. 대통령은 편집국장들에게 (정부와 언론의) 선의의 경쟁을 다시 주문했다. 그 승부의 잣대는 정확성이며 사려와 분별이 될 것이다. 언론도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 정부와 언론의 선의의 경쟁
그러나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라도 언론의 대통령 비판은 계속돼야 한다. 벼슬아치들은 제자리에서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노 대통령은 언론인이 안 된 게 다행스럽다는 것이다.
그가 기자가 됐다면 취재원보다 말을 더 많이 하고 가르치려 들고 이기려 했을지 모른다. 인터뷰를 하러 가서 인터뷰대상자보다 말을 더 하는 기자들이 실제로 있다. 기자는 말하기보다 들어야 하는데, 노 대통령은 잘 듣지 않는다. 기자로서 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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