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의 내게나 지금 내 딸에게나 <말괄량이 삐삐> 는 신명나는 이야기다. 예의 모르고, 말버릇도 고약하고, 옷차림까지 엉망진창이면서 한 손으로 뚱보 어른을 던져버릴 만큼 힘세고, 황금 돈이 엄청 많고, 위기에 처한 선장 아빠를 해적에게서 구해내는 삐삐는 지금도 선망의 대상이다. 말괄량이>
아이들 동화에는 아이스러운 자유가 살아 있어야 한다. “이제 막 인생의 희열에 눈뜨는 아이들에게 잔인한 교훈의 비를 쏟아붓지 말라. 어린 영혼의 싹을 일그러뜨리는 가짜 읽을거리를 가차 없이 쫓아내라.” 폴 아자르가 말하는 ‘가짜 읽을거리’란 무엇일까? 하느님에게 모든 사람을 자신과 같이 완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바리새인의 도덕,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오, 즐겁고도 그리운 근면함이여!”라든가 “아!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일어나라 게으름뱅이여!” “어린이여 꿀벌을 닮아라!” 따위의, 아무 맛도 없는 음식을 말한다.
아이들 책에 ‘도덕’은 필요하다. 결국에는 진리와 정의가 승리를 거두는, 교훈이 담긴 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들은 현재 ‘영혼’이 자라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도덕은 강요돼선 안 된다.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며들어야 한다.
<무지개물고기> (마르쿠스 피스터ㆍ시공주니어)를 보자. 혼자 멋지기 보다는 여럿이 함께이길 선택하는 무지개물고기. 이는 일방적인 “하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없이 주저한 끝에 스스로 ‘선택’한 도덕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무지개물고기>
레오 리오니의 책들도 좋은 예다. 작은 물고기들이 힘을 합해 큰 물고기에 대항하는 <으뜸 헤엄이> , ‘나’라는 개성을 찾고 즐기는 <물고기는 물고기야> , 정신적인 양식을 모은(그보다 프레드릭의 ‘다름’이 <개미와 배짱이> 의 배짱이처럼 일방적으로 매도당하지 않고 역할로 인정된 것이 더 값져 보이는) <프레드릭> …. 프레드릭> 개미와> 물고기는> 으뜸>
들쥐 다섯 마리, 네 마리는 모두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곡식을 모은다. 옥수수 알갱이와 밀과 짚. 그런데 프레드릭은 눈을 감고 공상에 잠겨 있다.
“넌 왜 일을 안 하니?”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그는 햇살을 모으고 잿빛 겨울을 위한 색깔을 모으고 기나긴 겨울을 맞아 이야기를 모은다.
춥기 만한 겨울, 햇빛도 없고 이야기 거리도 떨어졌는데….
프레드릭은 말한다.
“눈을 감고 노란색을 떠올려봐. 내가 황금빛 햇살을 보내줄게.”
[…]
“넌 시인이야.”
프레드릭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한다.
“나도 알아.”
레오 리오니의 작품은 분명한 메시지의 교훈을 담고 있지만 강요하지 않는 감칠맛이 있다. “어린이여 꿀벌을 닮아라!” 와는 차원이 다른 깊은 맛이 있다.
어린이 도서관 ‘책 읽는 엄마, 책 읽는 아이’ 관장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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