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대선주자 캠프 사무실. 지방 모대학 00학과의 K 겸임교수가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다짜고짜 대선주자 A씨를 만나게 해달라며 직원들을 졸랐다.
“미리 약속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 고 하자, 그는 “대선 필승의 비법이 있다, 꼭 만나야 한다”며 막무가내였다. 이에 대선주자 참모가 K 교수의 주장을 들어봤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디어는 없었다. 그가 꺼낸 문건에는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지난 대선관련 통계 자료를 기초로 상식적 수준에서 분석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참모는 “다음에 연락하겠다” 면서 겨우 돌려보냈지만, 그 뒤에도 K 교수는 잊을만하면 사무실을 찾아 참모진들을 골치 아프게 했다.
차기 대선레이스가 본격화하면서 대선주자 사무실을 노크하는 대학교수들이 늘고 있다. 교수 사회에도 대선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앞의 사례처럼 볼썽사나운 경우도 적지 않다.
신원을 공개하고 대선주자의 자문교수나 참모를 맡는 교수도 일부 있으나, 비공식적으로 대선 주자측과 인연을 맺으려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상당수 교수들이 겨울 방학 기간에 밀린 논문을 쓰거나 학회 참석이나 자료 수집 등을 이유로 해외로 나가곤 했던 것과는 달리 국내에 머무르는 비율이 높아진 것도 대선을 앞둔 이번 방학은 특징적 풍경이다.
정치권에 이미 발을 담그려는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 정치를 뜻하는 politics와 교수를 뜻하는 professor의 합성어)들에 대선 긍ㆍ부정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이른바 ‘정학협동’ 차원에서 교수가 대선주자의 정책 자문역을 맞아 선거에 도움을 주고 자신의 경험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캠퍼스를 선거바람에 휩쓸리게 하고, 선거 후 한 자리를 위해 학식을 파는 게 아니냐는 비판론도 적지 않다.
정치 교수들의 행태는 가지각색이다. 우선 스스로 만든 정책 공약 자료집을 들고 대선주자측을 찾아가는 ‘공약 제시형’이 있다. 여기에 동료 교수들과 함께 대선주자 지지 모임을 만들어 몸값을 높이는 ‘세 불리기형’, “과거 대선주자 캠프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며 대선 캠프의 참모로 써달라고 부탁하는 ‘경험 과시형’도 있다.
정치 교수들의 발걸음은 역시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대선주자에게로 쏠리고 있다. 특히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쪽에 러브 콜을 보내는 교수들이 아무래도 많다는 전언이다. 또 두 주자가 각기 텃밭으로 여기는 대구ㆍ경북 지역 교수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대구시 선관위 관계자는 “특정 주자를 지지하려는 학술단체들이 대선을 앞두고 마구 생겨나고 있어 예의주시하고 있다” 고 말했다. 아울러 뉴라이트 운동의 활성화에 따라 보수 우파 성향의 교수들이 과거 대선 때보다 부쩍 바빠진 것도 달라진 대목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 관계자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교수들이 평소 자신의 이념 성향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정당의 정책결정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며 “반면, 이념 정당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교수들의 정치 참여는 평소 학문적 지식이나 아이디어를 정책으로 풀어낸다는 측면에서 순기능이 있다” 면서도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정치에 관심 갖는 교수들이 너무 많은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대구=전준호기자 jhjun@hk.co.kr박상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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