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 선언 이후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여권에서 조명을 받는 것은 아이러니다. 누가 고 전 총리의 공백을 메울지를 말할 때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이나 김근태 의장보다 그가 더 화제다.
손 전 지사가 여권으로 옮겨 대선후보가 될 수 있다는 여권 일부 인사의 시나리오는 그만큼 드라마틱하다. 손 전 지사의 한나라당내 입지와 이념성향 등 개인적 요소, 그리고 아직 뚜렷한 선두주자가 떠오르지 않은 여권의 안개 속 대선구도를 감안하면 아주 황당한 그림은 아닐 수도 있다.
손 전 지사의 살아온 길, 이념적 좌표는 한나라당보다는 여권에 가깝다. 중도개혁 성향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당론에 비해 전향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는 다른 대선주자들이 반대하는 남북정상회담도 북핵 해결을 위해선 개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운동권 경력에 비(非) 영남 출신이라는 점은 당내 역학구도 상 큰 핸디캡이다. 그래서 당에선 늘 소수파다. 상당수 여론 주도 층에선 그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당에선 ‘우리 후보’로 인정 받지 못한다.‘손학규 계’를 자처하는 의원이 한 명도 없을 만큼 손 전 지사는 외롭다.
그는“손학규가 지키고 있는 한나라당을 누가 영남당, 수구꼴통당이라 하겠느냐”며 당내 역할론을 역설하지만, 반향은 크지 않다. 이 같은 현실적 한계와 잠재력이 그의 여권 행을 추측케 하는 토대다.
물론 손 전 지사는 “내가 살아온 길을 보라”며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는 18일 대구에서 기자들과 만나 “나를 데려가려 하는 여권 인사들은 한나라당으로 와서 당을 바꾸고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했다. 이를 약간‘악의적’으로 해석하면, 갈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답을 하기는 어려웠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손 전 지사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선 그의 의지와 외부 환경이 극적으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명분을 갖추고 당적을 옮긴 뒤 무시 못할 득표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가 지금 구도에서 ‘몸만 쏙 빠져나가는’ 탈당을 택하는 것에 대해선 우려가 많다. “제2의 이인제” “표를 위한 식언(食言)” 등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손 전 지사의 한 측근은“지금 넘어가면 지지도가 최소 15%는 되겠지만, 반여 감정 등 때문에 본선에선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손 전 지사의 기회는 정치지형의 대변화가 가져 다 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갈등이 깊어져 당이 깨지면 자연스럽게 이탈할 기회가 온다’는 게 대표적이다. 특히 고 전 총리 낙마로 여권의 전력이 약화해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의 경쟁이 사실상 본선으로 인식되면서 각기 딴 살림을 차릴 개연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의장과의 관계도 녹록치 않다. 여권에 아무런 지분이 없는 손 전 지사가 오픈 프라이머리 등을 통해 이들 주자와 아무런 프레미엄 없이 맞붙을 경우 우위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손 전 지사가 여권 후보가 될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손 전 지사가 모종의 보장을 받지 않고는 여권으로 가기 힘들다. 그런데 보장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한나라당이 분열하고 여권의 기존 주자들이 역부족을 시인, 공동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벌어져야만 손 전 지사의 공간이 생길 것이라는 분석이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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