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엑상프로방스에 계시는군요.
벌써, 정착을 하셨다니, 게다가 여행까지 다녀오셨다니,
선배님을 만나 뵙던 지난 초봄 어느 날로부터 얼마나 흘렀나
되짚어 보았습니다. 그 전 무엇을 했나, 아니 시간은 저를 위해 무엇을 부여했나,
그날 낮의 행로가 마치 그 많은 시간의 틈들을 메워주기라도 하듯
선연히 떠오를 뿐 잡히지 않는 날들이 흘러갔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3월 어느 주말 제주도에 이틀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250매 가량 소설 아닌 파리 기행을 집필했구요,
또, 정영문의 책이 나왔구요, 그전에 그의 책을 위한 매우 싱거운 헌사를
지어줘야 했구요, 그리고 오늘까지 질식할 것 같은 장편들(민음사 ‘오늘의 작가상 예심’)
읽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예심을 마치고 와인에 매우 흡족한 일식을
박상순 선배한테 타내어 먹고 심야 도로를 질주해서 방금 귀가했습니다.
돌아오는 중에 뭔가 봄밤이 미치도록 아까운 후배의 간청(사실은 모두가 같은 맘!)에
즉흥적으로 (언제나 즉흥적으로!) 남산 밤벚꽃 산책을 한 시간 가량 하고
쿨하게 헤어져 돌아왔지요.
꽃을, 달빛 아래 여러 종류의 벚꽃 구경을 했습니다.
남산 타워가 여러 방향에서 보석처럼 빛났죠.
지난 1월에 어둑해지는 요코하마 부두에서
209m 마린 타워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기억이 났고,
늘 탑만 보면 매혹되는, 그래서 급기야 그곳에 올라가고 마는
저의 못 말리는 성향을 새삼 인정했습니다.
벚꽃 환한 봄밤, 날씨가 초가을처럼 삽상해서 걷기가 좋았고,
동행한 사람들은 정작 자기들은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시간,
그 공간에 있게 된 것이 마치 특별한 선물이라도 되는 듯 감탄하고 좋아라 하더군요.
4월부터는 장편원고를 시작했어야 하는데,
열흘 가까이 남의 글만 읽다보니, 어서 빨리 소설 쓰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내일부터는 정말, 외면할 수 없이,
밀린 원고들을 써야만 합니다. 정말 가슴이 커억하고, 막히는 날들일 텐데요,
그래도 오늘 거대한 짐 덩어리를 내려놓는 순간만은 아, 내 소설! 그 생각뿐이었어요.
건강하시고요, 나날의 하루마다 행복하세요.
2003년 4월 11월 01시 35분 12호 정임
■ 김다은의 우체통
소설 같은 편지 쓰는 끼 많고 쿨한 마당발
함정임 씨가 1988년 문학사상 기자 시절 <고래뱃속에서> 를 만들며 만난 최수철, 그가 2003년 안식년을 맞아 프랑스에 갔을 때 쓴 편지다. ‘정임’의 편지를 읽으면 소설을 읽는 기분, 아니 소설 속 여주인공의 편지를 읽는 기분, 아니 소설 속 여주인공 편지 속에 박상순, 최수철, 정영문이 등장하는, 아, 기묘한! 고래뱃속에서>
끼 많고 쿨한 정임의 주변에 문우들이 많다. 그 마당발의 비결은 소위 디지로그. 때때로 혹은 하루에도 몇 통씩, 소설 같은 편지(위 편지도 지면상 중간을 댕강 잘랐다, 미안하다)를 이메일로 띄운다. 디지털 속에 아날로그의 호흡이 꼿꼿하게 살아있다.
소설가ㆍ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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