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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6> '고쿠고(國語)'의 생태학-이연숙의 <국어라는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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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46> '고쿠고(國語)'의 생태학-이연숙의 <국어라는 사상>

입력
2007.01.1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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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의 스물세 번째 글 ‘국어라는 이름--자존(自尊)과 유아(唯我)’(2006년 8월9일자)에 잠깐 불려나온 이연숙(李姸淑)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이연숙은 일본 히도츠바시대학(一橋大學)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사회언어학자다. ‘근대 일본의 언어인식’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저서 <국어라는 사상> (1996)이 얼마 전 한국어로 번역됐다(고영진 임경화 옮김). 비록 일본 이야기이긴 하나, 개화기 이래 일본(어)의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한국(어)의 풍경이 실루엣처럼 설핏 엿보이기도 한다. 오늘은 이연숙의 안내를 받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일본 언어사상사의 풍경을 들여다보며, 제가끔 한국 풍경을 거기 포개보기로 하자.

<국어라는 사상> 의 두 주인공은 우에다 가즈토시(上田万年: 1867~1937)와 호시나 고이치(保科孝一: 1872~1955)라는 일본어학자(‘국어학자’)다. 도쿄(東京)제국대학 사제지간인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국어(고쿠고)’와 ‘국어학(고쿠고가쿠)’의 거푸집을 만드는 데 실팍하게 이바지했다.

우에다는 이론 쪽에 쏠렸고 호시나는 실천 쪽을 파고들었지만, 이들은 ‘국어’가 창성(昌盛)하려면 이론(‘국어학’이라는 과학영역)과 실천(‘국어정책’이나 ‘국어교육’ 같은 정치영역)이 서로 굳건히 깍지를 끼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국학파를 비롯한 원조 보수주의자들에게 가공할 아나키스트로 백안시되던 이 두 사람이야말로 일본어의 자기확장 욕망을 가장 효율적으로 실현한(실현하려 애쓴), 다시 말해 제국주의 욕망에 휘둘린 국어론자라고 이연숙은 판단한다.

‘국어’와 ‘국어학’을 세우기 위해 우에다가 내딛은 발걸음은, 기묘하게도, 직업적 애국자들이라 할 재래 국학자들의 발걸음과 사정없이 어긋났다. 그는 당대의 일본어 연구를 고학(古學)과 과학(科學)으로 나누고 자신의 박언학(博言學 : 요즘 용어로 언어학)을 과학에 포함시켜 국학자들의 고학에 맞세움으로써, ‘애국적’ 학문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독일에서 소장문법학파의 이론적 세례를 받고 돌아온 우에다가 보기에, 대일본제국의 질서정연한 ‘국어’는 근대언어학의 과학 원리에 기대서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옛것 타령이나 하는 국학자들은 이 소명을 결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우에다의 판단이었다. 낡은 애국(적 학문)을 질타하는 새로운 애국(적 학문)이었다는 점에서, 우에다의 ‘국어학’은 메이지유신기의 ‘뉴라이트’ 이데올로기라고도 할 만했다.

국학파에게 아나키스트로 내몰린

우에다와 호시나의 한자 배격 국어 운동

그들의 주장도 결국 제국주의에 복무

막부시대 말기에 language의 역어로 보통명사 노릇을 하던 ‘국어’는 메이지시대에 이르러 슬그머니 일본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됐는데, 이 ‘국어’를 ‘국가’와의 유기적 관련 아래 논하며 ‘국민’을 호명하기 시작한 사람이 우에다였다. 우에다에 따르면 국어학을 수립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였고, 국민에게 ‘올바른 말하기, 올바른 읽기, 올바른 쓰기’를 가르쳐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국어학의 최종 목표였다.

그는 일본어를 가볍게 여기는 한학자나 양학자를 힐난하는 동시에, 고문에 얽매여 있는 국학자를 책망했다. 우에다가 보기에 일본어의 ‘순결’은 고래(古來)의 문장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입말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국어’는 현재성과 구어성(口語性)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극히 자연스럽고, 극히 쉽게 욀 수 있고, 따라서 누구나 바로 알 수 있는 말과 문체”만이 국어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쥘 수 있었다. ‘올드라이트’(국학)의 복고주의와 텍스트주의를 우에다가 경멸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형성된 ‘국어’는 “제실(帝室)의 울타리이자 국민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될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 ‘국어’는 일본에 오는 외국인을 일본화할 것이고, “조선인이든 지나인이든 구주인이든 미국인이든 진정 동양의 학술 정치 상업 등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동양 전체의 보통어”가 될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에다에게는 국어교육을 통한 국민의 형성과 동화, 그리고 ‘국어’의 해외 진출이라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국어’는 표준화되고 규범화돼야 했다. 국가주의가 흔히 그렇듯, 우에다의 국가주의도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이면(裏面)이었다.

한글학회 둘레의 개혁주의자들이든

한자를 사수하려한 보수주의자들이든

그들은 모두 정치적으론 우익이었다

우에다의 이 아이디어를 정책 수준에서 밀고 나간 사람이 그의 제자 호시나다. 강단에서의 정열보다 더 큰 정열을 문부성 안팎의 국어 관련 위원회들에 쏟으면서, 호시나는 ‘국어’의 보급과 진출을 위한 표준화 규범화 사업에 扁쪄杉?

1898년 문부성 촉탁이 된 뒤 그는 일관되게 표음식 가나표기, (한자 폐지를 최종 목표로 하는) 한자 사용 제한, 공공 기관에서의 구어문(口語文) 채용을 주장했다. 전후에 ‘현대 가나표기법’과 ‘당용한자표(當用漢字表)’로 간추려진 ‘국어개혁’의 사령부 한 가운데 있던 이가 호시나였다. 중국 동북지방에 일제의 괴뢰국가로서 다민족국가 만주국이 들어서자, 호시나는 ‘국가어’ 개념을 수립해 이를 만주국의 일본어에 포갰다. 그 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터지며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것이 운위되자, 그는 ‘공영권어’(공영권 내의 통용어) 개념을 만들어 이를 다시 일본어 위에 포갰다. 국어가 됐든 국가어가 됐든 공영권어가 됐든, 그것은 일본어여야 했다.

그러니까 호시나는, 그의 스승 우에다가 그랬듯, 일본어의 ‘진출’에 늘 마음을 쓰고 있었다. ‘국어’의 표준화 규범화 시도는 일본어의 이런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확장과 진출을 위해 허리춤을 추스르는 일이었다. 일본어의 해외 진출이 여의치 않은 것은, 호시나의 표현에 따르면, “토양의 죄가 아니라 종자의 불량으로 말미암는다.” 내지인들끼리도 서로 의사를 소통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언들이 춤을 추고, 일반인이 쉽사리 익히기 힘든 문어체 표현이나 역사적 가나표기법 같은 것이 일본어를 옥죄고 있는 한, 일본어의 해외진출은 난망한 일이었다.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와 대만 바깥으로 퍼져나가기 위해, ‘국어’는 ‘개혁’돼야 했다.

그러나 호시나의 이런 국어개혁(론)은 ‘국어의 전통’에 매달리는 국수주의적 정신주의적 보수파의 화를 돋궜다. 태고 이래의 기괴한 고토다마(言靈) 신앙에 사로잡혀 있던 이 국수주의자들에겐, 우에다와 호시나의 세련되고 효율적인 제국주의조차 국체를 부정하는 혁명사상으로 보였다. 프랑스 왕당파가 나폴레옹을 증오했듯, 프로이센 귀족이 히틀러를 경멸했듯, 국학파 둘레의 ‘올드라이트’는 우에다와 호시나의 ‘뉴라이트’를 혐오했다. ‘올드라이트’가 보기에, ‘뉴라이트’는 전통과 ‘정신’에 대한 존중심이 결여된, 천한 혁명파 족속이었다.

야마다 요시오(山田孝雄)가 선두에 선 국수주의자들의 반격은 1940년대 들어 특히 격렬해졌다. 야마다에 따르면 “국어는 영원히 하나다. 그것은 고금을 통해 절대적인 시간성 위에 서 있다”,“국어에는 선조 이래의 숭고한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 속에는 국민정신이 깃들어 있다. 국어개혁은 국가에 대한 모독이다”, “국어가 난잡하다든가 무통제하다든가 하는 말이 있지만 그것을 난잡하고 무통제하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메이지유신 이후의 로마자 채용론자, 한자배격론자, 가나표기법 파괴론자 등 이른바 국어 정책론, 국어개량운동을 행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요컨대 호시나는 일본어의 난잡함(표준화와 규범화의 결여)이 일본어의 해외 진출을 가로막고 있다고 여겼던 데 비해, 야마다로 대표되는 정신주의적 국수주의적 보수파가 보기엔 일본어를 그리 난잡하게 만든 것이 바로 호시나로 대표되는 국어개혁론자들이었다.

이 언어학적 우익 내부의 대립은 해방 이후 한국의 국어학계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의 힘을 빌려서라도 한자와 외래어를 몰아냄으로써 국어를 순화하려 했던 한글학회 둘레의 개혁주의자들이든, 민족의 유구한 전통을 내세우며 한자를 사수하려 했던 보수주의자들이든, 그들은 모두 정치적으론 명확히 우익이었다.

양쪽 다 ‘민족’ 패션으로 치장한 이 우익 분파들끼리의 다툼은 사소한 만큼이나 격렬했고 지루했다. 한글학회 둘레의 개혁주의자들은, 더러, 자신들의 ‘민족’ 패션에 ‘민중’ 패션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은 민중을 ‘위한(다고 주장되는)’ 개혁이었지 민중에 ‘의한’ 개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반민주적이었다.

우에다나 호시나 같은 일본의 국어개혁론자들에게서(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이들에게 공명하는 한국의 국어운동가들에게서) 대뜸 연상되는 유럽인이 하나 있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외무부 장관과 총리를 지낸 쥘 페리(1832~1893)다. 페리는 프랑스 각급 학교를 교회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 여성교육을 장려한 민주주의의 수호자였지만, 대외적으론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각처에 프랑스 군대를 보내 식민지를 건설한 제국주의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이 대내적 민주주의와 짝을 이루는 대외적 제국주의는 우에다나 호시나에게서도 볼 수 있는 면모다. 이들의 국어개혁은 ‘국어’를 더 많은 일본 민중에게 돌려주었지만, 그것은 식민주의적 팽창을 준비하는 김매기이기도 했다. 쥘 페리가 프랑스의 학교에서 오직 프랑스어만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지역 언어들의 생기를 앗았듯, 우에다와 호시나도 ‘국어’의 표준화를 가로막는 방언에 적대적이었다.

<국어라는 사상> 앞머리를 채우고 있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 1847~1889)와 바바 다쓰이(馬場辰猪: 1850~1888) 사이의 논쟁이 흥미롭다. 외교관이었던 모리는 입말과 글말의 간극이 메울 수 없이 벌어진 제 모국어에 절망해 간이(簡易)영어(불규칙성을 걷어낸 영어)를 일본에 도입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입말로부터 그리도 멀어졌다고 모리가 한탄한 글말이란 한문투 문장이다.

이에 대해 자유민권사상가 바바는 한자어나 한문에 대한 일본어의 의존은 예컨대 라틴어에 대한 영어의 의존과 다를 바 없다며 모리의 비관주의를 나무란다. 그리고 영어의 도입이 일본인을 두 계급(영어를 쓰는 계급과 영어를 쓰지 못하는 계급)으로 또렷이 분열시킬 것이라 우려한다. 영어를 들여오자는 제안에 대한 바바의 비판은 보기에 따라 적절하달 수 있겠으나, 한문에 대한 당대 일본어의 의존은 그가 평가한 정도보다 훨씬 더 컸던 모양이다.

젊은 시절 영국에서 공부하느라 한학의 소양을 쌓지 못한 바바는, 뛰어난 웅변가였음에도, 일본어로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저술활동을 오직 영어로 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논적(論敵) 모리가 한탄한, 입말과 글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야릇하게 증명했다. 개화기 한국 지식인들에게도 이런 고민과 분열이, 모국어에 대한 혐오와 숭모가 있었으리라.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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