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요즘 세상이 개는 소를 베끼고 소는 개를 베끼는 시대 아닙니까."
10년 전에 나온 영화 <넘버 3> . 일류가 되기를 꿈꾸는 삼류 인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송강호가 더듬거리며 말한 "이건 배, 배신이야!" 등등 당대의 유행어를 낳은 재미있는 풍자극이다. 넘버>
우연히 케이블TV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다가, 영화 속 사이비 시인 랭보가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호스티스에게 던진 이런 의미심장한 대사를 들었다. 책 500권만 사면 시인으로 데뷔시켜 주겠다는 잡지사에 돈을 주고 랭보를 소개받아 '개와 소가 서로 베끼는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 이 호스티스는 시인이 되고, 마침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지난해 말부터 한국사회에서 개와 소가 서로 베껴먹는 표절에다 대리번역, 대필의 추문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터져나오고 있다. 한 사회 정신문화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학계, 출판계에서다.
논문 표절 의혹 공방 끝에 사퇴한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는 "표절이나 중복 발표까지 문제 삼으면 장관에 임명될 교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의 관행이 돼버린 표절을 거꾸로 인정한 셈이다.
마광수 교수는 제자의 시를 약간 고쳐 자신의 시집에 실었다가 "내가 미쳤지, 죽을 죄를 지었다"며 표절을 인정했다. 개인적으로 마 교수 같은 사람도 한국사회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이런 가짜 글쓰기, 그렇게 만들어진 책에 둔감해져버린 우리의 정신세계다. 이 칼럼을 쓰면서도 혹시나 해서,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집계를 들여다봤다.
16일 현재 2007년 1월 1주 베스트셀러 종합 1위는 <인생수업> 이다. 이 책은 캐나다 사진작가 그레고리 콜버트의 작품을 거의 그대로 베낀 표지와 삽화를 사용했다가 콜버트가 서울중앙지검에 고소, 출판사 대표가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인생수업>
출판사측은 문제가 되자 지난해말부터 분위기는 그대로 비슷하게 삽화를 바꿔 여전히 책을 팔고 있다. 또 전 SBS아나운서 정지영의 대리번역으로 말썽이 됐던 <마시멜로 이야기> 는 아직도 베스트셀러 종합 6위 자리를 버젓이 지키고 있다. 마시멜로>
대필 의혹의 한가운데 있는 화가 한젬마의 책을 썼다는 한 대필작가는 "책이라기보다는 상품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 당 7~8매의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넘겼다"고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소설을 빼고 국내에서 발간되는 책의 절반 이상은 대필작가의 손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책 만드는 출판사의 소위 '스타 마케팅'에 얼굴마담과 바지사장들이 동원되고, 독자들은 거기 환호하며 이 책들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고 있는 꼴이다.
베껴 먹고 남들이 대신 써 준 책으로라도 허명과 돈을 얻으려는 이 구조는, 호스티스가 돈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영화 <넘버 3> 의 세계와 꼭 닮았다. 그 달콤한 구조에 책 읽는 독자들의 정신은 저도 모르게 마비돼간다. 넘버>
"결국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했던 이는 19세기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였다. 나는 천국을 믿지 못하지만, "천국은 틀림없이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한 보르헤스의 말에는 수긍이 간다.
그는 20여년 가까이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지냈다. 하지만 나이 오십이 넘으면서 시력을 잃어 그렇게 좋아했던 책을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으면서도,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을 천국으로 상상했다. 요즘 한국에서 책 만들어지는 꼴을 보면 이런 말들 앞에 부끄럽다.
하종오 피플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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