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에 올인 할 태세다. 그러나 정치권은 물론이고 국민 여론도 별로 감동하지 않는 모습이 민망하다. 정략에 익숙한 정치권과 변덕스러운 여론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다만 지금 형세로는 박수와 환호보다 냉소와 야유 가득한 무대에서 대통령 혼자 썰렁한 원맨쇼를 하다 내려 올 것이 걱정스럽다.
개헌 제안에 찬동해서가 아니다. 애초 진정성을 의심 받는 허망한 개헌 시도는 대통령의 권위뿐 아니라 헌법의 존엄성을 훼손할 것을 염려한다.
민주 발전과 국민의식 변화 등에 비춰 헌법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헌법규범을 고치는 일을 마냥 미룰 건 아니다. 그러나 개헌에 긴요한 국민적 합의와 정치세력의 타협이 어려운 상황에서 개헌에 올인 하는 모습은 스스로 실현가능성을 믿고 있는지 의심하게 한다.
● 진정성 스스로 부인한 '독재' 공방
진정성부터 없다니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뛸 것이다. 5년 단임제를 바꾸는 게 좋겠다는 데 정치세력과 국민이 동의하고 있고, 특히 개헌으로 대통령이 득 볼게 없으니 나라와 국민을 위한 충정으로 여겨야 옳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개헌 제안이 실현가능성을 도외시한 것으로 비친다면 진정성도 인정 받기 어렵다.
2년 전 뜬금 없는 대연정 제안과 곧장 비교할 수는 없지만, 실현성이 희박한 구상을 불쑥 들이밀고는 "이 좋은 걸 왜 마다하느냐"고 역정 내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
제안 시기의 적절성이나 정략적 의도 등은 국민이 잘 분별할 것이기에 새삼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심 없이 오로지 나라를 위해 개헌을 추진한다는 대통령의 자세가 그에 걸맞지 않은 점은 그냥 넘길 수 없다.
대통령의 의도가 순수하다면 개헌 제안에 앞서 야당을 비롯한 정치세력에 뜻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해야 순리라는 점은 다른 이들이 거듭 지적했다. 그보다 훨씬 거슬리는 것은 개헌 논의를 거부한 야당을 '오만하고 독재적'이라고 거칠게 비난한 것이다.
성의를 다해 설득해도 모자랄 지경에 대통령은 "받아놓은 밥상에 김샐까 봐 몸조심하는 모양"이라고 천박한 야유까지 서슴지 않았다. 개헌 명분과 의도가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이러고서 뭘 이루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대통령 말대로 야당이 여론만 믿고 안하무인 정치를 하는 꼴이 눈에 시더라도
대뜸 욕을 퍼붓는 것은 애초 설득할 뜻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무조건 반대를 일삼는 야당을 상대로 무슨 설득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른바 헌법개정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직접 상대할 의도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라면 굴곡 많은 헌정사를 경험한 국민에게 어떻게 비칠지 먼저 돌아보기 바란다. 그토록 욕하던 과거 독재권력뿐 아니라 세계사의 모든 독재자가 흔히 의회를 제치고 직접 국민에게서 정당성과 지지를 확보하려 시도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실현의지 없는 개헌 추진 부도덕
노 대통령 권력과 무관한 개헌을 독재권력의 집권연장 시도 따위와 비교하는 것에 화낼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개헌 발의권을 국회와 함께 지닐 뿐, 논의ㆍ결정하는 의결권은 국회가 갖고 국민투표까지 거치도록 규정한 헌법정신을 애써 외면하면 안 된다. 대통령과 국회의 독단을 동시에 견제하는 이중장치는 현실권력의 민주성이나 권력자의 선의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런 모든 고려를 무릅쓸 태세인 노 대통령은 언뜻 사명감에 겨운 듯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4년 연임제 개헌이 나라 장래를 좌우하거나 당장 절박한 과제라고 믿고 있는지 묻고 싶다. 특히 대통령 임기 등 권력구조 개헌을 앞장서 밀어붙이는 것이 늘 자랑한 절제된 권력행사인지 의문이다.
나는 개헌 문제에 청와대 비서관들이 일제히 나서 떠드는 것부터 헌법을 가벼이 여기는 행태라고 본다. 그 무모한 시도가 확고한 실현의지마저 없는 것이라면 지금껏 보인 어떤 정치행위보다 야비하고 부도덕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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