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부문의 아파트에서 (원가를) 공개하는 것은 검토할 수 있지만, 민간 부문에 대해 적용하는 것은 영업비밀을 침해한다고 본다." 권오규 경제부총리가 지난해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분양원가 공개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최근에도 그는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하기로 했기 때문에 민간부문의 분양원가 공개는 지나치다"고 말했다.
이런 권 부총리가 11일 분양원가 공개를 민간택지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1ㆍ11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그는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되 그것이 공급위축으로 나타나면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번 조치는 양자간에 조화롭게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고민에 나온 것임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소신을 굽힌 데 대한 어려움이 묻어나는 대목이지만, 권 부총리의 갑작스런 입장선회는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경제관료들이 갖고 있는 소신들이 정치풍파에 시들어가는 과정을 다시 한번 확인해줬다.
권 부총리가 분양원가 공개에 찬성했건 그렇지 않건 입장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시장변화와 같은 경제적 여건 변화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대선을 앞둔 여권의 힘에 눌린 것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도 지난해 초 취임 때는 재벌 계열사들의 순환출자 금지를 역설하다가, 여당의 반발에 밀려 갑자기 소신을 접었다. 이쯤 되면 평소 고위 공직자들의 발언과 소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지난해까지만 해도 수없이 불거져 나온 당정간의 갈등에서 아슬아슬했지만 정부가 쉽게 물러난 적은 많지 않았다.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충격에 휩싸인 여권이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세를 완화하도록 요구했지만 정부가 반대해 그대로 유지됐으며, 경기부양을 요구하는 정치권 목소리에 대해서도 비교적 차분히 대응했다. 하지만 올해 대선의 해에는 벌써부터 경제논리가 정치논리에 압도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이진희 경제부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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