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노사 갈등의 본질은 원칙과 잘못된 관행의 싸움이다. 회사는 이제부터라도 법과 원칙을 지켜 해마다 되풀이되는 노조 투쟁의 악순환을 끊겠다며 강경대응하고 있다. 더 이상 과거처럼 노조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노조는 이에 질세라 투쟁의 강도를 높인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회사가 슬그머니 백기를 들고 노조의 요구를 들어 준다는 사실을 경험칙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무원칙적인 대응이 노조의 투쟁을 더욱 부추긴 것이다. 이번만은 회사가 원칙을 고수하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큰 것도 이 때문이다.
●노조의 무리한 요구
투쟁 만능주의에 빠져 무리한 요구를 남발하는 노조, 원칙 없는 대응으로 사태 수습에만 급급한 회사,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노사 양 측에 오락가락 훈수를 두는 정부. 노사가 공멸의 길로 빠져들게 하는 ‘3종 세트’다. 노조는 일이 안 풀릴 때마다 걸핏하면 파업으로 회사를 윽박지를 것이고, 회사는 그 때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노조의 요구에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노조의 상식을 벗어난 무리한 요구는 비일비재하다. 지난해 3월 불법 파업으로 파장을 일으킨 한국철도공사의 노조는 2005년 8월부터 무려 80회나 사 측과 협상테이블에서 머리를 맞댔다. 그러나 절충점을 찾지 못하고 끝내 파업에 들어갔다. 협상이 파국에 이른 것은 노조가 근로조선 개선과 상관없는 해고자 복직 문제를 협상 쟁점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포항지역건설노조원 1,500명은 경북 포항시의 포스코 건물을 불법 점거했다. 사 측인 전문건설협의회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제3자인 포스코에 협상을 요구한 것이다. 지난해 3월에는 코오롱 노조 조합원들이 회사의 구조조정 방침에 반발해 회사 대표 자택을 무단 침입하기도 했다.
●회사ㆍ정부의 무원칙 대응
노조의 무모한 요구와 돌출행동은 회사의 무원칙이 낳은 결과다.
현대차는 1987년 노조 창립 후 20년 동안 한 해만 빼고 매년 진행된 파업에서 한 번도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적용한 적이 없다. 회사가 협상이 끝나면 타결축하금 격려금 성과금 등의 명목으로 조합원들에게 파업 기간의 임금손실을 메워 줬다. 또 2000년 이후 불법 파업에 대해 모두 9차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몇 개월 만에 취하했다.
현대차는 이번에도 노조의 잔업거부 등으로 생긴 생산차질과 시무식 폭력사태 피해 등에 대해 민사상 책임을 물어 노조위원장 등을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고,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철저히 지키기로 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번에는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해 실제로 원칙을 지킬 것인지 주목된다.
한국발전산업노조는 2002년 4월 38일간이라는 초장기 파업을 했다. 회사는 파업 내내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파업 참가자 5,372명 중 348명을 해임하는 중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파업이 끝나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위원장 1명을 제외하고 전원 복직시켰다. 회사 관계자는 “회사가 당시 법과 원칙을 앞세워 좀 더 강경하게 대응했더라면 지난해 9월 노조가 또다시 불법 파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무원칙 대응도 경계해야 한다. 정부는 노사관계에서 철저한 중립자가 돼야 한다. 정부의 섣부른 개입은 노사관계를 오히려 더 망칠 수 있다.
2003년 3월 두산중공업 사태 때 권기홍 노동부 장관이 현장에 내려가 불법 파업을 하는 노조 편을 들어 사태에 기름을 부은 것은 정부가 무원칙 대응을 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노조와 신경전을 하던 사 측은 결국 장관의 말 한마디에 모든 원칙을 포기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노조의 요구를 들어 줘야 했다.
정부는 지난해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불법 파업에는 엄정대응하겠다”고 외쳤다. 그러나 실제로 취해진 조치는 하나도 없었다. 2005년 미국 뉴욕의 지하철 파업 때 뉴욕시가 불법 파업을 한 대중교통노조에 소송을 내 조합이 하루 100만달러씩의 벌금을 물게 하는 판결을 받아낸 것과 대조적이다.
●노사 성숙한 협상문화 키워야
전문가들은 법과 원칙을 기반으로 한 노사의 성숙한 협상문화도 강조한다. 협상을 잘 해 노사가 서로 만족하는 합의안을 도출하면 투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발생한 포항지역건설노조의 포스코 건물 불법 점거 사태와 현대차 노조의 장기 파업은 노사의 교섭능력 부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협상의 기본인 양보의 미덕이 없었다. 서로 네 탓만 하고 삿대질에만 급급했다. 사 측은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노조는 “사측이 무성의한 태도로 협상을 한다”고 서로에게 파국의 책임을 돌렸다.
김태기 단뭅?경제학과 교수는 “노사 협상은 횟수가 아니라 양 측이 얼마나 진실성을 가지고 진지한 자세로 테이블에 앉는지가 중요하다”며 “노사는 협상도 일종의 게임이므로 법과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무노동무임금(無勞動無賃金) 원칙
파업 기간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원칙. 1997년 3월 노동법 개정 때 이 내용이 들어갔다. 이를 두고 사용자는 파업 장기화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 주장하나 노조는 노동운동 탄압이라고 맞서고 있다. 무노동무임금 원칙의 연장선에 있는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노조의 재정을 감안해 3차례 시행을 연기, 2009년 1월 1일부터 적용한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법·원칙 지켜 상생 이룬 기업들
법과 원칙을 굳게 지켜 사업장에 상생과 평화를 가져온 예는 많다.
지난해 11월 한국외국어대 노조는 ▦비정규직의 단계적 정규직화 ▦노조가입 제한 철폐 등을 학교 측에 요구하며 무려 215일 간 계속해 온 파업을 접었다. 노조는 “입시가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철회 배경을 밝혔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학교 측이 7개월 간 일관되게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견지하자 노조가 결국 두 손을 든 것이다.
한국철도공사 노조는 지난해 3월 해고자 복직 등을 주장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15일 간 파업을 할 수 없는 직권중재에 회부된 상태였기 때문에 불법 파업이었다. 공사 측은 즉시 파업 참가자들에게 업무 복귀 명령을 내렸다. 복귀하지 않은 조합원들에게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징계를 통보하는 등 초반부터 법과 원칙으로 단호하게 맞섰다. 노조는 4일 만에 파업을 풀었다.
GS칼텍스 노조는 2004년 여름 보름 간 불법 파업을 한 뒤 새 노조로 거듭났다. 관행적인 투쟁을 접고 상급단체인 민주노총도 탈퇴하는 등 회사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지난 해에는 임금협상을 회사 측에 백지 위임했다. 노조가 상생의 노사문화에 팔을 걷어 붙인 계기는 회사가 노조의 투쟁에 철저히 법과 원칙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회사는 2004년 불법 파업 뒤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적용했고 파업 주도자에 대해선 예외 없이 엄한 징계를 내렸다.
강성노조였던 서울메트로 노조도 새롭게 변신했다. “소모적이고 정치 지향적인 투쟁은 조합원과 회사에 도움이 안 된다”는 각성에 따른 것이다. 서울메트로 노조는 지난해 9월 “더 이상의 정치 총파업은 싫다”며 민주노총 총파업 불참을 선언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1994년 60일 간의 장기파업을 한 뒤 노선을 바꿨다. 회사가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적용하면서 임금 손실을 본 조합원들이 “투쟁의 효용성이 없다”고 판단, 상생의 길로 들어섰다. 12년 연속 무분규를 이어가고 있는 노조는 지난해 회사로부터 정년 1년 연장(57세에서 58세로)의 선물을 받는 등 대화로 챙길 건 다 챙기는 대표적인 ‘실용 노조’로 평가 받는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