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적 노조문화가 바뀌어야 기업이 살고 나라가 바로 선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벌어지는 정치성 총파업, 연례행사처럼 터져 나오는 노조간부 비리, 끊임없이 계속되는 첨예한 노사갈등…. 산업화와 정보화를 거쳐 사회는 빠르게 변해 왔지만 노동운동은 여전히 1980년대식 투쟁 방식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2007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3회에 걸쳐 한국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새로운 노사 상생문화 형성을 위한 대안을 모색해 본다.
두 사람이 있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박주선(56ㆍ가명)씨와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는 김영수(43ㆍ가명)씨. 울산시내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현대가(家)의 형제기업에서 일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지난해 삶은 사뭇 다르다. 차이는 어떤 성향의 노조에 속해 있느냐에서 비롯됐다.
●현대重 정년연장 공생
#1, 울산 동구 전하동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박씨는 지난해 한 시름 덜었다. 정년을 2년 남겨둔 상황에서 회사가 단체협상에서 노조의 정년 연장(57세→58세) 요구를 받아들여 1년 더 일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회사가 12년 연속 무분규 단체협상을 한 노조에 준 선물이었다. 연말에는 2만원권 재래시장 상품권을 받았다.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상품권이다. 노조가 울산 동구지역의 재래시장에서 발행하는 상품권 3억6,000만원어치를 구입해 조합원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정년 연장이 되면서 매년 해 오던 은퇴행사가 필요 없게 됐고, 노조는 은퇴행사를 위해 모아둔 돈으로 “침체에 빠진 재래시장과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래시장 상품권을 샀다. 연말에는 성과급 250%도 받았다.
●현대車 연초부터 시끌
#2, 현대차 노조원인 김씨는 새해부터 심란하다. 그는 지난 연말 회사가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원래 금액에서 50%가 깎인 성과급을 받았다. 성과급 삭감으로 촉발된 노사 갈등은 파업과 손해배상 소송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는 올해도 친구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귀족노조가 그 정도 받으면 됐지.
그 놈의 투쟁 지겹지도 않냐”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김씨는 그러나 기죽지 않는다. 계속 싸우다 보면 회사가 언젠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오리라는 것을 오랜 경험에서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여름 무려 한 달 동안 진행된 노조의 파업에 동참했다. 노조는 “파업 중독증에 걸렸냐”는 여론의 십자포화를 견딘 끝에 기본급 5% 인상 등 두둑한 보따리를 챙겼다. 물론 김씨도 그 수혜자다. 회사는 당시 파업으로 1조4,000억원의 생산 손실을 입었다.
▲투쟁의 덫에 걸린 노조들
투쟁은 여전히 한국 노조를 규정하는 단어다. 투쟁의 덫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는 노조가 많다.
현대차 노조는 강성노조의 대명사다. 지난해 11차례나 이어졌던 민주노총 총파업에 꼬박꼬박 참가했다. 모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 조합원의 근로조건과 상관없는 정치파업이었다. 1987년 노조 출범 이후 단 한차례(94년)를 제외하고 매년 연례행사처럼 파업을 했다.
현대차 노조는 상식에 벗어난 투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회사는 지난해 5월 울산공장에 신형차 생산 공장을 신축하려 했다. 그러나 노조가 반대해 여전히 공장 건설은 제자리 걸음이다. 노조의 반대 이유는 “주차장에 공장을 지으면 직원들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버스 등을 만드는 전주공장에서는 근무형태 변경안이 노조의 거부로 무산돼 지난해 5월 선발된 신입사원 700명을 아직 채용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가장 격렬한 투쟁은 포항에서 발생했다. 포항지역 건설노조원 1,500명은 임금인상 등 단체협상에서 사용자인 전문건설업협회와의 교섭이 안 풀리자 느닷없이 원청업체인 포스코 건물을 불법 점거했다. 노조원들은 포스코 직원 600명을 사무실에 몇 시간 동안 감금한 뒤 풀어 주고, 진압 경찰을 향해 화염방사 장비를 사용하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노조원들은 점거 9일 만에 백기 투항했다.
쌍용차 노조는 지난해 7월 회사의 구조조정 방침에 반발해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공장 문을 봉쇄하고 공장 내에서 전 조합원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극한적인 투쟁 방식이다.
▲투쟁 열기 올리려 할수록 차가워지는 여론
투쟁 위주의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강경 노선을 걷는 노조나 노동단체에 대해 “시민의 피해, 국가ㆍ기업의 경쟁력 악화 등은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단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해 발생한 강경 노조들의 파업이 대부분 조기에 수습된 것은 명분 없는 파업에 대한 시민들의 거센 비판여론 덕분이었다. 3월 한국철도공사노조, 4월 화물연대, 7월 포항지역건설노조, 9월 발전산업노조는 분노한 시민의 힘에 밀려 부랴부랴 파업을 접었다.
강경 일변도 노동운동에 대한 노동계 내부의 반발 분위기도 뚜렷하다. 노조 가입 대상 임금근로자 가운데 노조에 들어간 근로자의 비율을 뜻하는 노조 조직률은 89년 19.7%에서 2005년에는 10.3%까지 하락했다. 또한 노사 갈등을 지양하고 화합과 협력을 강조하며 지난해 9월 출범한 보수계열의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은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울산 현대차 등 지역 사업장에서 그 세를 점점 불리고 있다. 실익도 없이 투쟁만 외치는 노조에 염증을 느낀 조합원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노사관계본부장은 “조합원 감소 등 노조 상황이 해마다 어려워지다 보니 사 측에 대한 노조의 대응방식이 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며 “투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타성을 버리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치열한 자기 반성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 올 노사관계 더 불안
올 노사관계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성과급 삭감과 시무식 폭력 사태가 발단이 돼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현대자동차 노사 갈등은 신호탄에 불과하다. 산별교섭, 비정규직 관련 법 시행 등 올 한해 노사관계 불안을 조장할 변수들이 안팎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동종 기업 노조들이 뭉치는 산별노조가 생기면서 단체교섭 형태의 변화에 따른 노사 갈등이 우려된다. 양 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율은 민주노총 78%, 한국노총은 16.2%다. 노동계는 임금 등 단체협상을 산별노조 중심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예컨대 개별적으로 단체협상을 진행했던 현대차, 쌍용차 등 자동차 노조들이 금속노조라는 이름으로 합쳐져 사용자 대표 단체와 단체협상을 한다는 것이다. 개별 노조들이 힘을 합치면 사용자 대표들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는 계산이다.
경영계는 산별교섭이 또 다른 노사갈등만 부추길 것이라는 입장이다. 경영계 관계자는 “산별교섭은 협상 구조가 복잡해 현실에 적용하기 힘든 제도”라며 “단위 노조들이 산별교섭 뒤 부족한 부분에 대해 회사에 개별 교섭을 요구한다면 이중교섭에 따른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7월부터 시행되는 비정규직 관련 법에 노사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도 관심거리다. 이 법에는 비정규직 차별 금지를 규정하고 있지만 정작 구체적인 차별 기준은 없다. 정부는 중앙노동위원 등에 들어오는 진정사건을 처리하면서 그 기준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이다. 차별 기준을 놓고 비정규직과 사용자 사이에 첨예한 이견과 마찰이 예상된다.
대통령 선거도 올 노사관계의 핵심 변수다. 경영계는 대선 정국에서 후보자들이 노동계에 대한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면 노사관계가 더욱 꼬일 것으로 보고 있다. 노동계 역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대선 분위기를 충분히 이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노동연구원 은수미 연구위원은 “외환위기를 겪은 1997년을 제외하면 87년, 92년, 2002년 등 대선이 치러진 해에는 다른 해보다 파업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었다”며 “올해도 노사 문제를 대선이라는 정치적 공간에서 이슈화하려는 관행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일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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