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안해 강아, 그리고 친구되고 싶었어
강아 그동안 잘 지냈니?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너한테 편지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너는 글을 참 잘 쓰더라. 나는 글 같은 걸 잘 못써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몰라. 국어시간에 시를 지어서 발표했을 때 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나는 너에게 얘기해 본 적도 별로 없었지. 모래주머니를 만들어왔을 때 내 책상에서 너가 모래주머니를 마무리질려고 감침질을 할려고 했을 때 너는 그게 잘 안돼서 얼굴을 찡그렸었지.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데 너의 마음은 다를지도 모르겠지? 그때 나는 너한테 참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나는 그때 너를 무시해 버린 거야. 나는 너가 나한테 화내는 것만으로 생각이 되어서 화가 났던 거야. 그러나 너가 나한테 사과하러 왔을 때 내가 너를 무시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때 나는 너한테 사과를 받고 나서 더욱 부끄러웠었단다. 내가 너한테 사과를 해야 하는데 네가 먼저 해서…. 사과를 할려고 했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 너는 나한테 대해 매우 실망했을 거야.
강아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말을 잘 못했지만 속으로는 너를 매우 좋아했단다. 내가 직접 말해서 친구로 사귀고 싶었어. 몇칠을 집에서 나를 꾸짖어 봤단다. ‘나는 바보야 왜 함께 친구하자, 하는 말도 못해’ 하면서.
강아 이런 나를 싫어하지 말고 영원한 친구가 되줘.
이만 여기서 줄임. 답장을 기다리면서
1982년 12월 29일 명희
■ 명희야, 이 편지 만으로도 우린 좋은 친구야
24년 전의 명희에게.
1982년에 우린 중학교 1학년이었지. 12월 29일이면 네가 겨울방학에 쓴 편지네. 봉투에 붙은 백자 항아리 우표는 60원짜리. 망설이다 부친 건지, 깜빡 잊었던 건지 소인은 83년 1월 15일로 찍혀 있어.
어쩌지. 네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 네 책상에서 모래주머니를 감치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그러고 보니 진회색 천의 모래주머니가 눈앞에 어른거리긴 하는데 그게 맞긴 한지. 무엇에 쓰려는 모래주머니였을까. 불이 나거나 눈이 왔을 때?
어쨌든 명희야. 봉투에 네 주소가 씌어 있지 않아 혹시 내가 답장을 못 썼다면(겨울방학이 끝난 뒤 직접 건네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얘기할게. 난 섭섭하지 않았고, 화나지 않았고, 다 잊어버렸다고(!). 그리고, 정말 고맙다고. 이렇게 깨끗한 편지를 내 낡은 서랍 속에 남겨줘서. 가끔 생각날 때 혼자 웃을 수 있게 해줘서. 2007년 1월 강
■ 김다은의 우체통
우정의 향기는 세월을 넘어
글 잘 쓰는 ‘강’을 친구로 사귀고 싶었던 여중생 ‘명희’. 명희의 눈썰미대로 소설가가 된 한강. 24년을 뛰어넘어 소통하려니 목청껏 불러도 소용없고 전화도 이메일도 소용없다. 그래서 맞춤법이 더러 틀린 중학생 편지와 섬세한 30대 소설가의 편지를 나란히 놓았다. 무시, 사과, 바보, 얼굴, 영원한 친구…, 편지의 글자들이 세월을 가로질러 서로를 더듬도록, 서로를 알아보도록. 편지지의 파란 나비들처럼 서로의 날개를 스치며 맴을 돌도록. 명희와 강. 명희, 강!
김다은(소설가ㆍ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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