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 중국의 어느 임금이 촌로에게 바둑을 배웠다. 마지막 날 임금은 내기를 청했다. 노인은 목을 걸었고, 임금은 소원을 들었다. 오늘 좁쌀 한 톨, 내일 두 톨, 모레 네 톨…, 그런 식으로 바둑판에 돌을 놓을 수 있을 때까지 좁쌀을 달라고 했다. 바둑을 진 임금은 노인의 무욕(無慾)을 비웃었다.
헌데 약속의 반의 반도 지키기 전에 창고의 좁쌀이 거덜났다. 1, 2, 4, 8, 16, 32, …, 2의 361(19줄x19줄)제곱까지 가면 도대체 얼마인가. 임금은 크게 깨우쳤고, 노인은 수많은 '이름없는 명인(名人) 열전'에 전설 하나를 보탰다.
■ '한국일보사는 바둑한국의 최상좌를 이룰 한국명인전을 처음으로 마련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좀더 노력한다면 세계의 정상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1967년 12월 3일자 한국일보 1면 사고(社告)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우승상금 30만원을 내걸었다.
앞서 58년 제1회 전국아마추어 바둑선수권대회를 개최했고, 대학생바둑대항전 등도 최초로 만들었다. 1963년엔 서울~동경 국제전화바둑대회도 개발했다. 창의성과 개척정신이 필요한 바둑에서 세계정상에의 가능성을 보았고, 한국일보의 예언은 적중했다.
■ 1972년 5월 6일자에서는 '20세 명인 서봉수 탄생'을 1면 7단 크기로 보도했다. 대단한 파격이었다. 그는 18세에 입단, 1년 8개월 만에 한국바둑의 대명사 조남철 명인(8단)을 이기고 최연소ㆍ최저단(2단) 기록을 세웠다.
그를 지금까지 '명인전의 사나이'로 부르는 것은 타이틀을 많이 획득한 탓도 있지만 '된장 냄새 풀풀 나는 한국적 기풍'이 명인전과 걸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명인전은 조훈현 시대를 거쳐 이창호 시대를 맞았다. 조남철의 제1세대를 포함하여 제4세대에 이른 명인전의 자취는 세계정상을 향한 한국바둑의 역사였다.
■ 명인전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같은 이름으로 개최되는 유일한 기전으로, 유력 일간지가 주최ㆍ후원하는 권위와 전통의 상징이다. 일본은 1956년 이후 산케이ㆍ요미우리ㆍ아사히신문이 경쟁적으로 유치했고, 중국은 인민일보가 88년에 만들어 프로기사의 독보적 무대가 됐다.
일본에선 사무라이 정신을 표방하는 오타케 히데오, 중국에선 자유롭고 개방적인 마샤오춘을 각각 대표적 명인으로 부른다. 그들의 기풍에서 나라의 이상과 권위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3년 공백 끝에 '강원랜드배'로 부활한 명인전에 바둑 문외한도 환호하는 이유를 알겠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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