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년간 두 권의 책을 썼다. TV와 휴대폰이 아이들의 성장에 미치는 악영향과 중독 대처방법을 안내한 자녀교육서였다. 평소 자극적인 영상매체가 아이들의 교육에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이들 책의 컨셉과 구성은 어디까지나 전문 기획자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른바 요즘 출판계에서 유행한다는 '기획출판'이었다. 출판사에서 얼개를 잡고 (기획취지에 공감하며 글도 되는)저자를 섭외해 맡기는 형식이었다.
기획자는 기자의 자료수집을 도왔고, 주제에 맞는 사례들도 제공했다. 초고를 꼼꼼히 검토해 수정을 요구하거나 직접 고치기도 했다. 기획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두 권의 책은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 기자는 저자로, 각종 아이디어를 제공해 책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든 출판전문가는 기획자로 이름을 올렸다. 책의 생명은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한 사람의 사유와 감성과 철학이 담긴, 많은 시간을 투여해 얻어낸 정신노동의 산물이 아니던가. 물론 기자는 두 책의 서문에서 기획자에게 '사례인사'를 했고, 출판사도 충분한 품삯(인세 3%)으로 보답했다.
방송인 겸 화가 한젬마씨의 책 <화가의 집을 찾아서> <그 산을 넘고 싶다> 를 펴낸 샘터사는 본보의 대필의혹 제기(2006년 12월21일자 1ㆍ3면)에 대해 "한씨가 현장을 취재하고 느낀 점을 직접 쓴 내용을 구성작가가 다듬은 것일 뿐 대필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그> 화가의>
샘터사는 1970년 초 문화의 불모지인 이 땅에 교양지 '샘터'를 선보이고 피천득 선생, 이해인 수녀, 정채봉 선생 등의 작품을 발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출판사였기에 더욱 그랬다.
본보는 어쩔 수 없이 한씨가 직접 썼다는 초고를 공개(2006년 12월26일자 6면)했다. 글의 형태를 띤 원고라기 보다는 메모와 자료더미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방송에 사용했던 원고를 그대로 건넨 분량도 상당했다. 대필작가가 글을 맛깔스럽게 쓸 수 있도록 다양한 아이디어와 소재를 제공한 것이다. 이 정도 역할이면 '기획 한젬마', '글 000'라고 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그런데도 샘터사는 "한씨가 현장 취재와 답사, 기초원고 작성 등 출간 전 과정에 걸쳐 저자로서의 노력과 열의를 보였으며, 구성작가의 원고에 창조적인 관점과 해석을 더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대필이 아니라는 근거로 ▦책이 다루고 있는 분야가 '미술'인데 구성작가의 전공은 '국문학'이며 ▦이 작가에게 최고 수준의 대우를 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문제의 책들이 미술 전공서적이 아니라 일반인 대상의 수필집이라는 점에서 샘터의 해명은 궁색한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또 샘터사가 대필작가에게 충분한 보상을 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독자들이 듣고 싶은 것은 한씨가 쓴 책일 것으로 오롯이 믿게 만든 '지적 사기'에 대한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대필(代筆)이라는 게 무엇인가. '남을 대신해 글을 쓰는 것'이다. 따라서 대필기준의 핵심은 한씨가 썼다는 초고의 완성도에 달려있는 셈이다. 샘터사는 '저자의 진정성' 운운하며 변죽만 울릴 게 아니라, 한씨가 과연 '개개 문장과 글의 구성을 다듬고 아우르면' 될 정도의 초고를 썼는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샘터사가 대필의혹의 핵심을 벗어난 주장으로 진실을 계속 호도한다면, '기획출판'이라는 미명 하에 글의 온전한 몫을 앗아가는 몰염치한 출판사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재학 기획취재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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