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스타 김태희가 옷을 탐낸다. 비록 광고 속이지만, 잡지에 실린 한 디자이너 사진을 보며 "나 한 벌 주지…"라며 읊조리는 표정엔 선망이 뚜렷하다. 그녀, 트렌드세터를 자부하는 이 땅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주목하는 패션 디자이너 송자인(34)씨.
한국 패션을 이끌 기대주로 첫 손에 꼽힌다. 2004년 봄 스파컬렉션을 통해 데뷔했고 그 해 가을 자신의 브랜드 'JAIN by JAIN SONG(자인 바이 자인 송)'을 내놓았다.
짧은 기간, 송씨는 디자이너로서의 존재감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유행의 전위를 자부하는 갤러리아와 롯데백화점 편집 매장의 인기 디자이너가 됐고, 화장품업체 아모레퍼시픽에서는 유방암 캠페인과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함께 진행했다. 지난 해에는 인터넷 상의 해외 명품 구매 대행 사이트인 위즈위드에 입점, 쟁쟁한 해외 디자이너 브랜드를 제치고 최상의 아이템을 내놓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연말엔 서울 강남의 도산공원 앞에 단독 매장을 열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한국의 스텔라 매카트니'라는 별칭. 젊고 현대적인 여성을 위한 매력적인 옷을 만들어 낸다는 세간의 평가가 응축돼 있다.
"첫 쇼를 하고 나니 '웨어러블(wearableㆍ입을 만한)하다'는 평을 많이 받았어요. 호평이긴 하지만 웃기죠. 옷은 원래 입는 것인데 웨어러블하다니, 못 입는 옷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젊은 여성들을 흡인하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많지 않은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송씨는 이화여대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유명 디자이너의 딸로 태어나(1980년대~9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김동순씨가 어머니다), 말 그대로 옷 더미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패션에 대한 동경은 없었다. 옷은 일상에 불과했다. 늘 바쁜 어머니 덕에 혼자 자투리 천을 오리거나 가끔은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머리카락도 잘라내며 놀았다. "어머, 얘 어떡해, 또 잘랐어"라며 울상을 짓는 어머니 앞에 민망하게 서 있을 때 조차, 가위며 천을 평생 끼고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니가) 완벽주의자인데다 패션에 대한 확신이 강한 분이어서, 막연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옷 입기를 좋아해서 학창 시절 내내 '제일 옷 잘 입는 애', '옷이 제일 많은 애'로 통했지만 패션을 하면 평생 엄마에게 묶여 살 것 같았지요."
디자이너로 방향을 튼 것은 졸업 무렵, 막상 혼자 세상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번도 딸의 진로에 대해 훈수를 두지않던 어머니가 "유학 보내줄 테니 (패션)해보지?"라고 운을 뗐다.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공부하고, IMF 외환 위기 때 부도로 고생하던 김씨의 디자인실 '울티모'에 합류했다.
송씨는 개인 브랜드로 독립한 후 지금까지 모두 6회의 컬렉션을 가졌다. "특별하지만 과하지는 않은 옷"이 그녀가 생각하는 '자인'이다. 패션계의 평가는 기대 이상이다. "로맨틱한 여성미와 중성적인 매력, 동시대 젊은이들의 취향과 감각을 자극하는 예민한 솜씨를 갖췄다"는 것이 중평. 이만하면 꽤 자부할 만 한데 그는 "하면 할수록 한국에서 신인디자이너로 살기의 어려움을 절감한다"고 말한다.
"백화점에 들어가면 '매출이 곧 인격'이라고 천박한 영업 논리만이 살아, 신인의 창의력이나 디자이너로서의 고집은 싹 무시당하기 일쑤죠. 자금력이 떨어지니까 좋은 원단이나 기술자를 쓸 수 없는 한계도 존재하고요. 산업체가 신인에게 유통망이나 원단 개발 기회 등을 제공하는 해외 사례를 들으면 한없이 부러워요."
송씨는 올해 뉴욕에 쇼 룸을 계약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팔리지않는 옷은 사지 않는 엄정한 시장에서 가능성을 시험할 계획이다.
"처음 쇼를 할 때 '오랫동안 자기 색깔을 잃지않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한 기억이 나요. 브랜드가 고객과 함께 나이 먹으면서 '쇼 따로, 매장 옷 따로' 였던 1세대 디자이너 브랜드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요. 그러려면 브랜드 정체성을 밀고 나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시장을 개척해야죠."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 내가 본 송자인/ 신상품 마음에 안든다고 머리 민 당찬 후배
10년도 훨씬 넘은 일이다. 선배 디자이너 김동순씨의 패션쇼 장에서 송자인을 처음 만났다. 유명 디자이너의 딸이라기엔 지나치게 수수한(?) 대학 초년생은 낯을 퍽 가렸고 담백했다.
몇 년 후 그녀가 어머니를 도와 패션계에 발을 내딛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가끔 그녀가 신상품 디자인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머리를 싹 밀어버리고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당찬 구석이 있구나 싶으면서 언뜻 또렷했던 눈빛이 떠올랐다.
3년 전 첫 패션쇼를 한 날. 마음 속으로, 물건 되겠다 싶었다. 인체의 형태미를 잘 표현해 주는 디자인, 트렌드를 지나치지 않으면서 정확하게 반영한 디테일 등은 신인다운 순수함과 극적인 잠재력을 동시에 보여줬다.
감히 말하건대 1960, 70년대만 해도 패션 디자이너로 살기가 요즘보다는 수월했다. 지금은 백화점 마다 고가 수입 브랜드가 도배를 하고, 근본도 모를 싸구려 브랜드가 넘쳐 난다. 기성 디자이너도 홀대 받는 시대인데 젊은 디자이너가 성공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 어렵다. 그럼에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송자인이라는 이름은 젊은 패션 애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다. 선배 디자이너로서 참 대견하고 고맙다.
장광효 (패션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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