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족의 탄생> (2006, 감독 김태용)에 나오는 가족은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다. <바람난 가족> (2003, 감독 임상수)처럼 온 가족이 바람나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족보와는 무관한 집안이다. 쉽지 않지만 가족의 계보를 그려보자. 남매인 미라와 형철을 중심으로 형철과 함께 온 스무살 연상의 무신. 무신을 따라 온 전 남편의 전처가 낳은 딸 채현과 채현의 애인 경석. 경석의 씨다른 누나인 현실주의자 선경과 로맨티스트 엄마 매자.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미라, 무신, 채현이 이룬 가족은 한 명도 피로 엮여있지 않아 가족이라 부르기도 거북하지만 한 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고 사니 딱히 뭐라 달리 부르기도 힘들다. 바람난> 가족의>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를 두 시간 가량 보고 나면 가슴이 답답하거나 찜찜한 느낌이어야 할 것 같은데 <가족의 탄생> 을 보고나도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미라와 무신을 모두 엄마로 모시면서 즐겁게 사는 채현과 그 가족에 합류하는 경석의 이야기들에 슬그머니 웃음 짓다보면 영화는 끝이 난다. 그 보기 좋은 모습 때문에 가족을 이루는 여배우 셋이 연말에 그리스에서 열린 데살로니키 영화제에서 공동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흔치 않은 사태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가족의>
<가족의 탄생> 을 보고나면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다양한 가족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핏줄이 아니라 사랑에 기대어 탄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장밋빛 전망에 이르기까지 생각은 시위를 떠난 활처럼 멀리 날아간다. 가족의>
실제로 주위를 둘러보면 핏줄로 묶이지 않은 가족들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가족의 탄생> 과 같이 극적인 구성은 아니더라도 자유로워진 이혼과 재결합 속에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들이 발견된다. 며칠 전 대학교수와 재혼을 발표한 유명한 개그우먼은 자신의 두 딸과 새로 맞는 배우자의 아들과 딸을 합쳐 여섯이 한 가족을 이룬다고 한다. 유명한 여성 작가가 성(姓)이 모두 다른 세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가족은 모두 성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이미 세계 최고치에 근접해 있고 재혼자의 비율도 1972년 남자 5.4%, 여자 2.9%에서 2004년 남자18.2%, 여자 20.4%로 높아졌다. 가족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족을 ‘핏줄로 얽혀 어찌할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낡아빠진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다. 어쩌면 가족의 구성은 핏줄 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상황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찍이 <가족, 사적 소유및 국가의 기원> 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가족이라는 개념과 사적 소유라는 개념을 연결시켜 이야기하면서 가족이라는 단위가 역사성을 가진 변화 가능한 것이라는 암시를 했다. 우리나라에서 핏줄로 묶인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해체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는 것도 복잡해지고 있는 사회, 경제 체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보면 변화는 자연스럽다. 가족,>
하지만 진화학자들의 견해는 좀 다르다. 이들은 핏줄로 엮이지 않은 가족은 자연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가족 안에는 심각한 문제가 잠재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화학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이들의 연구도 동물의 행동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한다. 동물의 무리에서 핏줄로 묶이지 않은 가족 구성원은 가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자의 경우, 여자형제와 사촌, 어머니와 딸, 이모와 조카처럼 가까운 친족들이 집단을 이루어 산다. 혈연관계가 불분명한 수컷 두세 마리, 혹은 서너 마리가 암컷들의 무리에 들어가 통치를 하는데 통치 기간은 기껏해야 몇 년 정도이다. 통치하는 수컷들이 바뀔 때, 새로이 등장한 젊은 수컷들은 이전에 있던 수컷의 새끼들을 차례로 찾아내 죽인다. 이런 행동은 다른 종에서도 폭 넓게 관찰된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행동이 널리 퍼져있는 이유는 이런 행동을 하는 녀석들이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녀석들보다 훨씬 빨리 번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녀석들이 많이 살아남고, 따라서 이런 행동이 일반적인 행동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동물 세계의 이야기를 사람에게 섣부르게 대응시키는 것은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킬 확률이 높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사람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다. 이들이 사람에게서도 사자와 비슷한 성향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 발단은 신데렐라 이야기였다. 호박이나 유리 구두와 같은 소품까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지만 신데렐라 이야기는 세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콩쥐, 일본의 베니자라, 인도의 무리몽이나 타니안 같이 새엄마의 학대에 심한 고생을 했던 아이들 목록은 아주 길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편재는 이 이야기에 물리적 근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진화학자들은 아동학대와 관련된 통계를 연구했다. 이들은 빈곤 문제와 같은 다른 요소들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아동학대의 경우만을 세어보았는데 새엄마나 새아빠와 살았던 아이들의 경우가 그렇지 않았던 경우보다 치명적인 아동학대를 받은 경우가 100배나 많았다. 그리고 그 비율에 편차는 있었지만 캐나다 영국 호주 등 연구 범위를 넓혀 보아도 그 결과는 비슷했다. 폴란드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연구는 전근대 사회에서도 새엄마나 새아빠와 함께 살던 아이들의 사망률이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어 이것이 현대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지금도 수렵 채취로 생활하는 파라과이의 한 부족의 경우에도 새엄마나 새아빠와 사는 아이들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의 경우보다 두 배 가량 더 높다. 이것은 핏줄로 묶이지 않은 자식을 학대하는 것이 문화병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연구가 맞다면 핏줄로 묶인 가족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구성원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훨씬 더 안락한 보금자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농업사회도 아니고 전통적인 산업사회도 아닌 현재의 사회는 지금 핏줄로 엮인 가족을 넘어선 새로운 결합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난처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화학자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매우 느린 과정을 연구하기 때문에 사회ㆍ경제ㆍ문화적인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두드러지게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화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한계를 슬기롭게 넘어왔다. 나는 변화의 물결에 감히 몸을 실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세상엔 표독한 새엄마가 표독한 친엄마 보다는 훨씬 많지만 표독스런 새엄마보다 따뜻하고 친절한 새엄마가 훨씬 많다. 이 점에서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
과학평론가ㆍ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주일우
■ 서울의 '고인돌 가족'?
우리 몸은 원시인과 차이 없는데 문화 환경은 급변, 현대병 등 낳아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다른 시간을 산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에 있는 진화의 시계는 매우 느리기 때문에 석기시대의 고인돌 가족이나 현대를 사는 우리나 생물학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문화적 변화는 진화의 시계에 비해 너무나도 빠르고 몸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다. 수 만 년 전에 살던 고인돌 가족이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의 서울 한복판에 내린 셈이다.
따라서 진화학자들이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 보고 연구한 결과들이 우리가 놓인 사회ㆍ경제ㆍ문화적 조건들과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새로이 등장하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에 대해 진화학자들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이유도 느린 진화의 시계를 통해 보면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인간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가 느린 진화의 시계를 빠르게 돌릴 것인지, 아니면 시간의 차이가 점점 커져 몸이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인지를 판단하기엔 아직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너무 얕다.
하지만 진화학자들의 연구가 당장에 아주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분야도 있다. 현대병의 대부분이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석기 시대에는 의자에 몇 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당시 사람들은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놀려야만 했다. 우리의 척추와 허리 근육은 오늘날의 엄청난 하중을 견디게 설계돼 있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요통이나 디스크 질병이 생긴다. 수렵시대에는 굶주림에 대비해 몸에 지방을 축적해야 생존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 경쟁을 뚫고 태어난 현대인도 '본능적으로'지방을 섭취하려 한다. 따라서 심장병을 피하려면 무조건 지방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 아니라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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