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는 생명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쏟아져 나온 40대와 50대 조기 퇴직자 문제는 청년 실업과 함께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큰 이슈다. 올 한 해 한국일보는 구직전선에 나선 4050세대의 눈물과 웃음을 소개할 계획이다. 또 관계부처와 기관 단체 업계와 공동으로 일자리 장터와 재교육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 4050세대의 인생 2모작을 지원한다. 그 첫번째로 거듭되는 실패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제2인생을 모색하고 있는 조기 퇴직자 네 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 자격증 2개 땄는데…나이 장벽앞엔 휴지
정부 부처와 공기업에서 28년간 회계ㆍ계약 업무를 담당하다가 2년 전 산재로 명예퇴직한 조홍상(55)씨. 치료를 마치고 지난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구직에 나섰지만 여전히 실업자 신세다. 직장을 다니며 방송통신대와 해양대에서 법학을 전공해 석사학위까지 받았고 정보통신 관련 자격증도 2개나 갖고 있지만 나이의 장벽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연락 오는 곳이 없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심정으로 회사 4곳을 직접 찾아가 면접도 봤다. 인사 담당자들은 “나이가 50대 중반이라 그 인건비라면 젊은이 두 사람을 쓸 수 있고, 지휘체계 때문에라도 현실적으로 힘들다…”며 퇴짜를 놓기 일쑤였다.
퇴직 때 받았던 1억원으로 2년 넘도록 5명의 식구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윤씨는 “경륜 있는 사람 한 명을 쓰면 두 명 몫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해도 담당자들은 나이가 많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부터 표시하더라”며 “정부가 일자리를 늘려주는 기업에 세무조사를 면제하는 정도의 정책이 아니라 법인세 감면 등 실질적 혜택을 주는 방법을 모색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2, 40개 회사에 이력서… 전화 한통도 못받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0여년 동안 4곳의 직장에서 세무ㆍ회계 업무를 담당해온 박만수(42ㆍ가명)씨가 마지막 직장에서 옷을 벗은 것은 지난해 10월. 연매출 100억원대의 탄탄한 서비스업체였지만 중간 간부급에 대한 감원바람이 불자 팀장이었던 박씨 역시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노동부와 인터넷 취업사이트를 통해 40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3개월이 다 되도록 전화 한 통 받지도 못했다. 전산회계, 전산세무 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고 회계업무에 잔뼈가 굵어 곧 직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박씨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취직에 가산점을 준다는 노동부 산하 고용지원센터를 찾아 2차례나 구직 프로그램을 이수 했다. 자신감 회복프로그램, 이력서 쓰기 요령 등을 배웠지만 내용이 부실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얼마를 받든 오로지 일만 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는 박씨는 “나이 때문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면접이라도 봐야 무엇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지 알 수 있겠지만, 면접 기회조차 없으니 그저 막막할 따름…”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3, 중간에 퇴직했다고…“문제있는 사람 취급”
대기업 계열의 전자회사에서 생산관리 책임자로 일하다가 2005년에 조기 퇴직한 이춘우(50ㆍ가명)씨는 “회사 다닐 땐 회사에 충성하며 일 열심히 하는 것만 생각했다”며 “천년만년 그 회사 다닐 것도 아닌데 왜 재취업 준비를 안 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떨궜다. 지난해 여름부터 구직 전선에 나선 이씨의 최대 약점은 학력이다. 고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는 “내 경력엔 임원급으로 전직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선뜻 고졸 임원을 쓰겠다는 회사가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학력 말고 재취업을 어렵게 하는 복병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정년을 못 채우고 중간에 퇴직한 사람에 대해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회의 편견이다. 그래서 재취업을 위한 그의 활동은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가장 친한 고교 동창도 그가 조기 퇴직해 다른 직장을 찾고 있는 것을 모를 정도. “주위의 눈이 두려워 퇴직하고 나서 재취업하려고 한다는 것을 철저히 비밀로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재취업 활동도 많이 위축됐죠.”
지난 연말 취업 박람회를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만난 전 회사 동료의 도움으로 “꽃 피는 3월엔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는 이씨. 그는 “조기 퇴직한 4050 세대들이 당당히 구직 전선에 나설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 10개월째 매일 구직 “가방에 이력서 30통”
지난해 3월에 중견기업 인사 담당 부장을 하다가 퇴직한 유동인(48)씨는 재취업을 위해 매일 서울 여의도의 노사공동재취업지원센터에 간다. 지난해 가을 심한 슬럼프에 빠져 일주일 쉰 것을 빼면 10개월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내가 이래봬도 사람 뽑는 일만 10년 넘게 한 인사 전문가입니다. 처음엔 이력서에도 공들이고 정말 의욕적으로 구직에 나섰죠. 그런데 한 30번쯤 면접에서 미끄러지다 보니 힘이 쭉 빠지더라구요. 술 먹고 죽으려고 한강에 간 적도 있어요.”
그는 재취업이 안 되는 이유를 내성적인 성격을 들었다. 적극적으로 회사 문을 두드리고 자신의 비전을 밝혀야 하는 구직자에겐 치명적인 약점이다. 가방 안에 잠자고 있는 이력서가 30통이 넘는다. 다 써 놓고 제출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는 “한 두번 떨어지다 보니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고 말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선 그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취업에 대비할 생각이다. 그가 회사에서 주로 담당했던 인사, 총무 등 관리 쪽 일은 이력서나 면접에서 특기로 내세우기엔 너무 평범한 업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는 “우선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해병대 등에서 하는 극기훈련에 참여한 뒤 내게 맞는 직업 훈련을 착실히 받아 나만의 무기를 만들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 4050 재취업 전략은
“이력서 써 본 기억이 까마득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자의든 타의든 오랫동안 몸 담았던 직장을 떠나 재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겪는 애로는 비슷하다. 40~50대의 경우 실업기간이 길어지면 ‘나이 때문인가’라며 아예 전직을 위한 노력조차 포기하는 등 무력감에 빠지기가 쉽다. 전직지원전문 서비스기업인 제이엠 커리어의 윤종만 대표는 40~50대 재취업 희망자를 위한 몇 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윤 대표는 우선 ‘장기전에 대비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라’ 고 충고한다. 마음은 급해도 장기전에 돌입한다는 각오로 세부적 활동계획을 수립하고 생활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잡일에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전직에 전념하는 마음가짐도 필수적이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의 과업이 성공적 재취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의 첫 인상을 좌우하는 이력서 작성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OO년 OO학교 졸업, OO년 입사…’ 식의 ‘문방구식 이력서’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력서에는 이전 직장에서 자신의 직무와 성과를 면밀하게 분석해 표현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일을 했으면 그것을 어떤 식으로 매출로 연결 시켰다는 식의 분석적인 이력서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집에서 전직을 준비해서는 어려움을 겪기 쉽다. 낮에 집에서 머물면 오히려 가족관계만 나빠지기 십상이다. 혼자서 준비하기는 벅차므로 노사공동 재취업센터나 경총 아웃플레이스먼트 센터 등 전문기관을 이용하면 이력서작성, 협상전략, 헤드헌터 이용방법, 면접요령, 네트워크 활용방법 등 프로그램을 무료로 수강할 수 있다. 이처럼 전문기관의 도움으로 체계적으로 재취업을 준비하면 자신감도 얻을 수 있다.
윤 대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포기하는 것은 금물”이라며 “성공적인 전직의 열쇠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재취업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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