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갈등이 극에 달해 올 대선이 이념의 한 판 대결이라고 한다. 이념이 삶과 생각을 망라하는 모든 것의 총체라면 이념으로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을 테니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대선을 이념으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맞는 것일까.
적어도 여러 여론 조사들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한 번 가져야 할 만한 의문이다. 일전에 한국일보가 여론조사를 분석해 지역ㆍ세대ㆍ이념 등 대선의 3대 변수를 진단한 결과 이념 구도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 졌음이 확연해 졌다.
자신의 이념을 진보라고 규정한 사람들 중 정당지지는 한나라당이 으뜸이었고, 대선 주자 지지에서도 이명박 고건 박근혜 등 순이었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전 시장은 열이면 열 사람이 보수라고 지칭할 것이 뻔한데, 자칭 진보층의 정치 선호가 이렇다면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열린우리당에 실망한 결과라고 하기만도 어려운 게 이들 만큼은 지지 정당 유보라는 응답으로 나타나는 것이 상식에 가깝다.
무엇을 견주어 진보나 보수를 가르는 것인지, 진보 보수를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등의 후속 질문이 나올 법하다. 이런 결과는 그 동안 이념 대립으로만 알고 있던 정치갈등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야 할 여지를 던진다.
● 진보층, 한나라당 지지 높은 것은
386세대 문제를 다룬 최근 한 신문의 대담에서 나온 말들이 재미있었다. "진보와 보수 의미조차 헷갈린다. 누가 무엇을 바꾸려는지, 누가 무엇을 지키려는지 선명하지 못하다." "이념 대결… '또 싸우나'하는 느낌 뿐이다." "말싸움을 즐기는 이념 갈등이 정치적 무관심만 키우는 것 같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는 저서 '한국의 정치변동'에서 이념 갈등의 본질을 분명하게 짚어 낸다. 한국의 이념 갈등은 사회 경제 체제 성격을 가르는 좌ㆍ우파의 대립은 아니며, 정치세력이나 일반 국민들 사이의 이념 격차가 그리 크지도 않고, 북한문제 한미동맹 등을 놓고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지만 이는 이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도덕적 가치관의 문제들이라고 지적한다.
다만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주관적인 판단이나 느낌이 정치적으로는 중요하지만, 이념 갈등이 실제로는 자신의 위치와 이익 사이의 갈등을 포장하는 포장지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진보층에서 '보수꼴통' 한나라당 지지가 가장 많고, 이념 대결 하면 '또 싸우나'하는 인상만이 남는 이유가 그래서 인 듯 설명이 된다. 이념과잉의 결과가 탈이념의 각성을 부른 격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몇 년 전 "별 놈의 보수 다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라며 선과 악으로 진보와 보수를 갈랐지만, 결국 증명된 결과는 무능과 고립이다. 노 대통령의 실패는 진보의 패배가 아니라 속 빈 정권의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과정의 연속이자 집합이다.
대선을 이념의 틀로만 보려 하다가는 허위와 거품의 속임수에 말려들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가능성과 시도는 벌써 엿보인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이 어제 "대한민국에 수구냉전 세력은 한나라당 하나로 충분하다"고 했다는데, 바로 이념을 공격과 방어의 포장지로 쓰려는 위장술이다.
● 뒤로 돌릴 것 앞세울 것 판별해야
위장에 동원되는 것은 말이다. 정치는 말이지만 포장용 말은 구분할 줄 알아야 선거도 잘 할 수 있다. "할 말을 다 하겠다"며 '발언 정치'에 다시 나서 쏟아내는 노 대통령의 말들도 잘 가려야 한다. 집권 4년이 지나 반복되는 숱한 말들 중에는 사실 후보 때나 듣고 말았어야 할 내용들도 여전하다.
그는 말에 능하지만 말을 막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뿐 국민이 듣고 싶은 말을 하진 않는다. '갈등 친화적'으로 도발하고 거품을 씌운다. 청중이 흩어질 수 밖에 없다.
올 한 해를 장식할 이념판과 말판에서 거품을 걷어내고 봐야 한다. 뒷전으로 돌릴 것과 앞세워야 할 것을 판별해야 한다. 대선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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