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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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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입력
2007.01.0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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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바닷가에서 살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자꾸 보다보면 무감각해지게 마련이어서, 눈만 뜨면 보이는 바다는 그저 그런 일상적 풍경이었다. 하지만 저물녘 하굣길 버스 차창 너머로 만나는 바다만큼은 달랐다. 검푸른 바다를 수놓는 시뻘건 저녁놀은 말 그대로 빛의 향연이었다. 바다는 해가 기울기 직전에 가장 빛나고 아름답다.

● 빛나는 순간도 찰나에 불과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의 교훈이 인생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서른 줄에 들어서 황지우의 시를 통해 배웠다.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 두 행짜리 짧은 시는 자연의 이치와 인생을 겹쳐볼 때 울림이 커진다.

저물면서 빛나는 것이 어디 바다 뿐이겠는가. 묵은 김치나 바이올린 선율처럼 인생 역시 오래 묵을수록 깊은 맛이 나지 않겠는가. 한동안 나는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의 교훈이 늙고 소멸해가는 것이 뿜어내는 뜻밖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문득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가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길고 긴 시간 속에서 빛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저물녘 바다는 아주 잠깐 동안만 아름다움을 뽐내다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꽃이 만개하면 지는 일만 남는 것처럼,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지나면 조용히 사라지는 일만 남는다. 젊음이 정점에 이르면 늙는 일만 남고, 최고의 지위에 오르면 물러날 일만 남는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 경구가 있다. 네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언젠가 죽을 목숨이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라도 죽음이 엄습할지 모르니 매순간 후회 없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가장 빛나는 순간을 구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의 교훈 앞에 지나치게 위축될 필요는 없다.

지금이 최고로 빛나는 순간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거부하고 발버둥 친다고 영원히 빛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빛나는 순간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는 없지만, 그 순간을 얼마든지 알차게 보낼 수 있고, 바다처럼 품위 있게 저물 수 있다.

● 2007년 희망과 겸손을 배우자

2007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벽두부터 요란한 말들의 성찬(盛饌)과 올해가 저물 무렵 치러질 국가적 대사를 생각하면 그리 녹녹한 한 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새해 기분이 시들기 전에 한번쯤 바닷가에 가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처럼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자.

화려하게 저무는 바다는 인생이 팍팍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올 빛나는 순간에 대한 희망을, 행복한 사람에게는 저물 순간에 대비한 겸손을 가르쳐 줄 것이다.

전봉관ㆍ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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