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이땅의 빛 속에 선 당신
암흑(暗黑) 속에 푹 잠겼습니다. 제 손을 눈앞에 들이밀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동지 섣달 밤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 썼다고 그려보세요. 한발이 엉거주춤 나가자 소름이 돋습니다. 거대한 벽이 가로막는 착각, 나락으로 떨어지는 환상이 밀려옵니다.
“이러면 안돼!” 온 신경을 곧추 세워 봅니다. 차가운 벽을 짚고 흰 지팡이(케인)를 자동차 와이퍼처럼 좌우로 흔듭니다. 앞 사람과 부딪히고 뒷사람과 엉킵니다. 아우성이 들립니다. “무서워요.” “제가 있는 곳이 어디죠.” “어디로 가야 해요.” 어둠의 공포에 짓눌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전해옵니다. 참가자 1명은 1분도 못돼 절규하며 빛 속으로 달아납니다.
놀이공원 ‘유령의 집’이 아닙니다. 전 지금 전시회에 와 있습니다.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 입니다. 비장애인들의 시각장애 체험 무대 입니다. 빛 속에 선 당신, 비장애인들은 전시회에 오기 전에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앞이 안 보이는데 전시(展示)가 웬 말이냐고. 그렇지만 “눈으로만 본다는 고정관념은 버리십시오.” 전시회가 전하는 메시지 입니다.
눈이 무용지물이 되자 다른 감각이 시나브로 잠을 깹니다. 발끝에 눌리는 땅의 감촉, 코끝에 살포시 닿는 옆 사람의 날숨, 귓전에 맴도는 ‘따닥 따닥’ 흰 지팡이의 불협화음. ‘시각이란 놈이 감각의 독재자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퍼뜩 옵니다. 다른 이들도 오롯이 느끼고 맡고 들을 수 있다고 놀라워 합니다.
온전치는 않습니다. 칠흑 속에 묻힌 저는 앞 못 보는 장애인일 뿐입니다. 도움 없인 한발 한발이 위태롭지요. 참가자 6명을 이끄는 가이드는 우리가 시각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 당신이 빛 속에 익숙한 것처럼 이들은 늘 어둠 속에 살지요.
전시 설립자인 안드레아스 하이니케(독일) 박사는 “장애는 정해진 게 아니고 다수가 규정한 것일 뿐. 역할이 바뀌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라고 합니다. 암흑 속에서는 당신과 내가 장애인이 되고 시각장애인은 보통 사람이 되는 이치인 까닭입니다.
가이드 권순동(22ㆍ연세대 경영3)씨는 고3때 사고로 빛을 잃었습니다. 그는 들떠 있었습니다. 늘 도움을 받다가 이제 사람들의 길잡이가 됐으니까요. “열심히 공부해서 멋진 회사원이 되고 싶다”고 다짐합니다.
권씨가 인도한 전시회는 경이롭습니다. 풀밭과 자갈밭, 나무가 우거진 공원은 발과 손의 감촉으로 봅니다. 복잡하고 위험한 도시는 청각으로 봅니다. 시장 좌판에 벌인 과일과 채소, 쌀은 후각으로 봅니다. 박물관의 모빌은 얼굴에 부딪히는 느낌으로 봅니다.
다들 감탄합니다. “오이는 정말 까칠까칠하구나. 횡단보도의 결도 보이는 구나. 왜 눈을 뜨고 있을 땐 보지 못했을까.” 감각의 발견인 셈이죠.
눈을 잃으니 얻는 게 있습니다. 참가자 박윤영(24ㆍ여)씨는 “혼자 있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사람이 의지가 됐다”고 합니다. 또 자꾸 실수하게 되니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게 됩니다. 부재(不在)는 소통과 배려를 안겨줍니다.
어둠 속의 대화에는 바(Bar)도 마련돼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바텐더가 상큼한 목소리로 부릅니다. 음료를 주문하고 돈을 지불합니다. 지폐에 찍힌 시각장애인용 표시는 참 유용합니다.
모두 같은 처지니 대화는 허심탄회합니다. 참가자들은 시각장애인에게도 희망과 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텐더 이혜림(23)씨는 “(시각장애인은) 보통 안마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행사를 통해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활짝 웃습니다.
60분의 관람이 끝났습니다. 빛 속으로 나옵니다. 눈이 부십니다.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당신을 소통과 배려가 숨쉬는 어둠 속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2007.1.5
From=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어둠 속의 대화'에 초대합니다
1989년 독일에서 시작돼 19개국 500만명 이상이 관람한 '어둠 속의 대화' 전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값진 경험을 누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장소 :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
일시 : 1월5일~2월25일(오전 10시~오후 6시)
관람료 : 2만원(장애인 50%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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