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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아메리칸 버티고' "난 반미에 반대한다" 佛 철학자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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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아메리칸 버티고' "난 반미에 반대한다" 佛 철학자의 외침

입력
2007.01.0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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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버티고 /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ㆍ김병욱 옮김 / 황금부엉이 발행ㆍ478쪽ㆍ1만6,500원

반미를 외칠 명분은 넘치게 많고 변호해줄 건더기는 찾기 힘든 이 판국에, 그래서 반미 제스처가 철 지난 열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마당에, 미국이라면 자다가도 종주먹을 들이대는 유럽 지성계에서, 외롭지만 의연히 스스로를 ‘반(反) 반미주의자’라 부르는 이가 있다.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면서 빼어난 소설 문장까지 지닌 베르나르 앙리 레비다. 그가 2005년 한 해 동안 미국 전역을 종ㆍ횡단하며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적은 책, 요컨대 자신의 ‘반 반미’의 명분과 논거를 정리한 책이 <아메리칸 버티고(american vertigo)> 다.

그가 전체주의에 대한 원초적인 혐오와 자유에의 갈망으로 무장한 신철학의 주창자이며, 이성의 편에서 세계의 분쟁지역을 누벼온 ‘앙가주망’ 전통의 모범적 계승자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반 반미’는 결코 간단한 얘기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말 그대로 현기증(vertigo) 나도록 다양한 현실과 복잡한 맥락이 있다…,는 게 레비의 주장이다.

“‘언제나 그건 미국의 잘못이다!’만 반복해서 외쳐댈 줄 밖에 모르는 정신병자들을 비웃어주”기 위해, 또 ‘반미주의라는 (상투화한) 유령’에 “정직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식은 “그저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는 이 전술을 “운전자의 오른쪽 자리에 꽉 눌러앉아 바퀴 아래에서 펼쳐지는 킬로미터들의 리본에 온몸으로, 관능적으로 찰싹 들러붙는다”고 표현한다.)

그는 성조기의 홍수 사태에서 역사 부재에 기인하는 ‘의도된 애국심’의 과잉 기미를 읽고, 키치적인 박물관과 유물 열풍을 두고는 “자기 만의 족보를 다시 쓰고자 하는” 미국의 신경증을 간파한다. 고속도로 1차로에서 느린 속도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미국인들을 보며, 미국인의 평등에의 열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동부의 뉴포트에서 서부의 북쪽 끝 시애틀까지, 리오타르가 ‘태평양의 벽’이라고 했던 101번 고속도로를 따라 샌디에이고와 멕시코 티후아나와의 국경까지, 다시 뉴올리언스와 마이애미, 미국 감옥체계의 상징이 된 관타나모를 거쳐 케이프코드까지 장장 1만5,000여 마일을 누빈다. 스스로 국민임을, 미국인임을 거부하며 옛 ‘필그림 파더스’의 정신으로 자족의 삶을 일궈가는 종교공동체, ‘문명화한 야만’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설 감옥, 세상과 벽을 쌓음으로써 “이 나라의 위대성을 담보해온 시민정신이라는 전통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은퇴자들의 호화 사설도시….

그리고 그 여정에 만난 다양한 인종의 시민들, 뉴레프트-신보수 거물 정치인과 좌ㆍ우파 지식인, 소설가, 유명 대중저술가 등과의 대화가 있다. 애국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매춘부, 관타나모의 추한 제국 병사의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든 엘리트 전투기 조종사, 죽음의 미학에 매료된 무기 판매상이 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잘못 자란 아이”라고 비난하는 샤론 스톤, 그를 통해 미국 민주당의 미래를 보고싶은 워런 비티, 클린턴 성스캔들을 폭로한 뒤 민주당원으로 일하는 데이비드 브록, 철학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조지 소로스, 민주당 대선 주자 힐러리 클린턴과 바락 오바마, 이라크전을 입안한 펜타곤 출신의 매파 정치인 리처드 펄도 있다. 역사의 종언을 외쳤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문명간 충돌을 예언한 새뮤얼 헌팅턴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테러리즘에 대한 그들의 위선과 이론적 허술함을 논박한다.

책은 여행기 형식이지만 그 내용은 다분히 사변적이다. 그렇지만 속도감 있게 읽힌다. 가령 그가 시애틀에서 캐루악을 떠올리고, 애슈빌에서 스콧 피츠제럴드를 추모할 때, 혹은 서배너의 다층적 아름다움과 뉴올리언스의 매혹적인 느린 시간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이 책의 육중한 사명을 감싸고 있는 여정의 감미로움을 이물감 없이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레비는 이 여행의 목적,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있는가’라는 근원적 코드와 가시적 표면의 연계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현기증 나는 미국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그가 읽어낸 징후들- 기념 메커니즘의 범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비만, 사회적 분열과 차별화 등-에 대한 분석, 미국을 비난하는데 사용되는 ‘상투적 관념들’-근본주의, 신보수주의, 제국주의 등-에 대한 변론.

물론 21세기 제국의 ‘신사적인’ 행태를 고대 로마와 20세기 초 유럽의 제국주의 모델과 단순 비교하는 식의 억지도 없지는 않지만, 그의 변론은 야무지고 힘차다. 미국의 위기는 인정해도 결코 그 미래를 의심하지는 않는 이 ‘반 반미주의자’의 변론에 설득당할지는 배심원인 독자의 몫이다. 어쨌든 미국은, 이 기품 있고 정연한 변론자가 있어 꽤 든든할 것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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