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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통일보다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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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통일보다 중요한 것

입력
2007.01.03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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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미소 양국군의 한반도 진주부터 치면 60년이 넘었고, 1948년 서울과 평양의 단독정부 수립부터 쳐도 60년이 돼간다. 분단 말이다. 그 세월, 통일의 열정은 남북 양쪽에서 드세게 요동쳤다.

그 열정은 분단 초기에 참혹한 전쟁으로 폭발했고, 휴전 이후에도 운동량을 길게 유지했다. 그것은 남북 주민집단 내부의 자발성에 바탕을 두기도 했고, 남북 양쪽 정부의 계산된 동원에 기대기도 했다. 외세가 강요한 분단이었던 만큼, 그 부자연스러운 질곡을 바로잡겠다는 열정이 그리도 오래 간 것은 자연스러웠다.

● 아리따운 백낙청의 통일담론

오늘날, 통일의 열정은 남북 모두 많이 잦아든 듯하다. 환호와 감동 속에서 새 천년을 열어제친 6ㆍ15공동선언도, '평화'의 지평에서라면 몰라도 '통일'의 지평에서는, '선언적' 의미를 넘어서는 동력을 얻고 있지 못하다.

분단의 세월이 쌓이면서 그것을 '배냇조건'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세대가 한반도 주민집단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데다, 남북 양쪽의 내부 상황과 국제정치의 역학이 한반도 통일에 친화적이지 않은 탓일 테다.

남쪽의 경우, 지금도 새된 목소리로 통일을 되뇌는 세력은 한 무리의 국가주의 논객들과 민주노동당 안의 소위 '자주파' 정도다. 앞쪽은 명백히 수구우파고 뒤쪽은 그 수구우파에 의해 '친북좌파'로 불리지만, 국민국가의 자기확장 욕망에 마구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둘 다 어기찬 우익이다.

이런 어기찬 우익 분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통일을 어기차게 이야기하는 이로 계간지 <창작과 비평> 의 편집인 백낙청씨가 있다. '분단체제'라는 개념을 벼려내고 이 체제의 극복 방안을 궁리해온 이 원로학자 덕분에, 우리 사회의 통일 담론에는 정파적 슬로건 바깥의 우아함이 더해졌다.

백낙청씨는 1월1일자로 창비 홈페이지에 올린 <2007년, 색동담론 아롱진 한 해가 될까>라는 글에서도, 6ㆍ15공동선언 제2항의 '남북연합'(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 개념 속에 '평화 대 통일'의 양분법을 녹여내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의 생각으로는, "국가연합의 성립은 평화론의 견지에서는 하나의 주권국가로 통합되기 전에도 아름다운 공존이 이뤄지는 셈이고 통일론의 입장에서는 '1단계 통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평화공존"이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아리따운 만큼은 실속 있지 못하다. "시민참여에 의한 실질적 통합작업이 축적되었을 때 비로소 남북의 당국자가 합의하고 선포하는 국가연합 구상이야말로 수많은 소모적 갈등을 해소할 길을 열어준다"고 말할 때, 백낙청씨는 언어(의 변증법)로 현실을 대체하는 관념론자로 보인다.

그 관념론이 그에게서 건강한 비관주의를 앗아간다. 그래서 그의 전망 속에선, 국가연합(연합 이후 단계는 말할 것도 없고!)에 합의하고 선포하는 것을 상황에 따라 목숨 걸고 막을 남북 지배계급(외세는 그만두고라도!)의 사악한 이성과 변덕도, '시민참여'의 자리를 남기지 않는 북 체제의 전일성도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연합 뒤의 한반도에 들어서야 할 민주주의가 어떤 것이든, 그 민주주의는 양쪽의(지금 형세로는 주로 북쪽의) 정치유산과 역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자기부정의 위기는 적어도 한쪽 지배계급을 전쟁의 유혹에 취약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평화 대 통일'의 양분법은, 상황에 따라, 백낙청씨 생각과 달리 '쓸모없는 담론'이 아닌 것이다.

● 우리의 선택은 평화라야 한다

이렇게 평화와 통일이 맞바꿈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지녔다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다. 한반도의 남북 주민이 자유롭게 오가고 사이좋게 지내는 길이 꼭 남북이 한 나라를 이루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고, 그 평화체제 속에서 복지를 축적하는 것이다. 통일은 당위가 아니다. 통일부도 '남북교류부' 정도로 이름을 바꾸는 게 어떨까? 아니면 통일부를 없애고 그 업무를 외교통상부로 넘길 수도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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