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새벽4시. 조의행(57)씨는 어김없이 어둠 속으로 달려나간다.
폐부(肺腑)를 찌르는 칼 바람 속에서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맥박이 빨라지면서 심장은 터질 것 같다. 2시간30분 동안 그렇게 25㎞를 뛰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999년부터 9년째 하루를 시작하는 통과의례다. 조씨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운 게 바로 달리기다. 온몸의 근육이 꿈틀대는 짜릿함, 그게 바로 살아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새벽 운동을 마친 조씨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공업사로 향했다. 10평이 채 안 되는 좁은 작업실, 쇳가루가 날려 사방은 검게 그을려있고 빛이라고는 2대의 작업용 기계 위에 놓인 조명등이 전부다. 조씨가 동업자와 함께 재기의 꿈을 키워가는 소중한 공간이다. 그는 2001년 2월부터 친구인 동업자와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조씨는 한때 잘 나가는 사장이었다. 고교 졸업 후 기술을 배워 1986년부터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중소업체를 운영했다. 직원 10명에 연 매출은 7억원을 훌쩍 넘었다. 한국과학기술원에 실습용 장비를 공급할 정도로 실력이 괜찮았다. 돈 버는 재미도 쏠쏠했다. 집도 사고 공장도 늘리고 부러울 게 없었다.
97년 말 IMF는 모든 걸 앗아갔다. 거래처가 줄줄이 쓰러지면서 10억원이 넘는 빚만 남았다. 조씨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기력한 내 자신이 싫어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지인들의 집과 서울역을 전전하며 술로 밤을 지샜다. 형제가 9남매나 됐지만 사채업자들이 찾아올까 싶어 만나지도 못했다. 아내(52)는 이삿짐을 나르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중 2와 고 1이었던 아들과 딸은 집으로 돌아오라고 애원했지만 사채업자들의 성화 탓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듬해 10월의 어느날, 조씨는 대낮에 술에 취해 북한산 언저리에 누워 있었다. 마침 한 무리의 산악회원들이 곁을 지나갔다. 조씨는 이들의 정겨운 대화에 이끌려 무작정 따라갔고, ‘막걸리나 한잔 하자’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힘을 얻었다. 그는 “이 때부터 등산을 시작했다”며 “사람들과 다시 어울리면서 내 인생도 서서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현재 이 산악회 회장이다.
조씨는 99년 초 집으로 돌아갔다. 산악회원의 권유로 달리기를 시작해 마라톤 풀 코스를 30차례나 완주했다. 2001년에는 매일 4시간씩 365일 동안 1만2,748㎞를 달린 비공인 세계기록도 갖고 있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 “운동할 시간에 돈 벌어 남은 빚이나 빨리 갚으라”는 핀잔도 많았다. 그러나 조씨는 단호하다. 그는 “IMF 이전에는 그저 하루하루 돈 버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지만 달리기를 하면서 내 자신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며 “그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새해 소망이 궁금했다. 조씨는 “빚도 거의 다 갚았고 돈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는 벌게 됐다”며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고 싶다”며 말했다. 여든 살까지는 마라톤을 거뜬히 완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자신감 앞에 에베레스트는 그리 높은 산이 아니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사진=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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