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듯한 학위·학점도 없지만…‘수유+너머’ 등 재야 인문학 강의에 수강생 북적시간·돈 쪼개 스스로 공부 “인문학에 위기는 없다”
인문학은 죽어가고 있는가. 역사와 철학과 문학과 미술이 죽을 수 있는 것인가. 여기 "즐거운 지식이 새벽을 시작하고 있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학위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공부가 좋아 인문학에 매달리는 사람들. 그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한 아카데미에 "위기는 없다"고 반박한다. 새해의 들뜬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인간과 세상의 문제를 놓고 진지한 고민을 이어가는 풀뿌리 인문학 지킴이들의 이유있는 삶을 들여다보자. 편집자주
들뜬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던 지난 달 21일 저녁 7시. 서울 용산구 용산동 남산 자락의 연구ㆍ생활 코뮨 ‘수유+너머’의 회원들은 이사 준비로 부산했다. 매주 평균 40여 개의 세미나와 강좌가 열리는 공간. 연말까지 잡혀있는 그 일정들을 하나도 빼먹지 않으면서 운영 공간 전체를 “순차적으로 절묘하게” 옆 동으로 옮겨 재배치한다는 게 이들의 계산. 종로 시절 연면적 160평이던 연구ㆍ강의ㆍ세미나 공간이 용산으로 오면서 300평으로 늘었고, 이번에 옮기면 400평이 된다고 했다. “어수선하지요? 그래도 확장ㆍ이전하는 겁니다.” 찐 고구마를 건네는 한 회원의 농담이 없더라도 분위기는 사뭇 활기찼고 또 진지했다. 복사기와 씨름하는 사람, 책꽂이 앞에 서서 눈을 부라린 사람, 책을 펼쳐놓고 머리를 맞댄 사람들…. “오늘이 하반기 ‘주제학교’(석사급 강의) 종강하는 날이거든요. 모두들 그 강좌 수강생들이에요.”
대학은 인문학이 위기라고 외치는데, 재야 인문학 기지들의 풍경을 보면 아닌 것 같다. 학위를 주는 것도 아니고 강제도 없는데 공부하겠다고 오는 사람이 날로 늘어난다. 전공과 무관하게, 그저 공부하고 싶어서, 자기 돈 내고 시간 쪼개서 배우는 보통 사람들이다.
수요가 많다 보니 새로운 기지도 등장하고 있다. ‘철학아카데미’ ‘문예아카데미’ ‘풀로엮은집’ 외에 3월이면 ‘문학과지성사’가 운영하는 인문학과 예술의 복합 문화공간 ‘사이’가 문을 연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 양성소로 유명한 ‘심산스쿨’도 6일부터 1년 과정의 인문학 강좌로 재야 인문주의자 조중걸의 ‘예술사 : 철학적 해명’을 시작한다.
‘수유+너머’ 주제학교 강좌의 좌장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이 날 텍스트는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도 않은, 유럽의 저명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의 저서의 번역 원고 마지막 장이다. 텍스트 요약과 함께 논쟁점을 찾아 제시해야 하는 발제 조원들은 강의 전에 밤샘 토론을 벌일 만큼 ‘빡센’ 강좌에 속하지만, 수강생 가운데는 직장인도 있고 학부생도 있다. 이진경 교수가 좌장으로서 개입하는 비율은 10~20%나 될까. 시종 토론으로 진행된 3시간이 별 삐걱거림 없이, 팽팽한 긴장과 느슨한 웃음으로 이어졌다. 이날 종강을 했어도 수강생들은 기일 내에 강좌에서 다룬 개념 하나씩을 정해 논문 수준의 에세이를 써내야 한다. 물론 학위도, 학점도 없다. 인류학 석사 과정에 있다는 한 수강생이 “대학에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지적 허기를 여기서 채운다”고 말하니까, 곁에서 웃고 섰던 이 교수가 ‘나도 채운다’며 끼어든다.
“미처 생각지 못한 논점들을 이 친구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발견하곤 해요. 또 이들의 토론에 개입하지는 않더라도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뭔가를 찾아가죠. 이들이 주지 않는 것을 저는 늘 얻어요.”
강좌팀이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쫑파티’를 시작할 즈음, 이사 준비팀도 당일 할당량을 채웠는지 건물 전체가 조용한 어둠에 묻혀 있었다. “거의 놀자판”이라는 청소년 강좌에서부터 “가장 어렵다”는 강학원 과정까지 이 건물은 또 이런 활기로 내일을 시작할 것이다.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 씨는 ‘풀로엮은집’에서 이번 겨울 학기에 사회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요제프 레만의 <사회철학에의 초대> 를 강독하는 8주 과정이다. 학문 장사가 싫어서 밥벌이는 따로 한다는 그는 회사에 다니는 웹사이트 기획자다. 헤겔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러 권의 저술ㆍ번역ㆍ서평에서 박학다식과 깊이, 통쾌한 글쓰기로 꽤 많은 열혈 독자를 거느린 주인공이다. 사회철학에의>
제2강이 열린 지난달 21일, 그는 수강생들을 협박했다. “숙제 해왔냐. 안 해오면 강력 제재 하겠다. 그러려고 주먹을 ‘야스리’(줄)로 갈고 있는 중이다. 인격적으로 괴롭혀서라도 공부시키겠다”는 말에 수강생들은 긴장했다. 엄포가 아니다. 그는 계속 질문을 던져 수강생들을 괴롭힌다. 대충은 없다. 이번 강의 교재도 첫 문장부터 막히는, 머리에 쥐가 날 만큼 어려운 책이다. 숙제는 미리 읽고 요약하기다. 내용이 하도 어렵다보니 같은 문단을 놓고도 수강생마다 요약 내용이 제각각 달랐다. 이날 강의는 속어와 전라도 사투리, 썰렁하거나 신랄한 농담이 난무하는 걸진 입담 가운데 ‘이론과 실천의 상호이행’ ‘실천적 진리론’ 등 난해한 개념의 고공 비행을 펼쳤다.
수강생은 약 20명, 대부분 직장인들이다. 취업은 전공인 공학으로 하겠지만 혼자 인문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의 기본을 다지기 위해 그의 강의를 세 과목째 듣고 있는 공대생도 있다. 이 진지한 공학도는 애정어린 구박을 받았다.
“저 친구 때문에 1시간 일찍 왔다. 올해 읽고 공부할 책을 의논하고 싶다고 해서. 공대생이 사회철학을 공부해? 요즘 세상에 그건 시대착오이고, 인생 엉망으로 산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강 씨는 그를 계속 갈구는 중이라고 한다. 3년 계획으로 책 한 권 공동 번역하는 과제도 맡겼다. 실제로 2년 간 애쓴 끝에 강씨와 공동 번역서를 낸 수강생이 있다.
무엇이 이들을 재야 인문학 기지로 불러 모았을까. 대충대충은 통하지 않을, 단단히 각오해야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 강 씨의 말대로, 학위나 명예가 필요하다면 딴 데 가서 좀 더 ‘뽀대나게’ 공부할 일 아닌가. 어떤 갈증이, 어떤 욕구가 그들을 떼민 것일까. 인문학 위기론은 거기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최윤필기자 walden@hk.c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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