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지식 시대… 병든 건 학문 아닌 대학삶과 분리된 엘리트식 학문 추구한 교수·아카데미의 구조적 위기일 뿐대학 밖의 지적 욕구·소비는 늘어나 "제도권과 분리된 재야 인문학은 현상"
“아카데미가 죽어가고 있다. 외적인 권력에 의해 처절하게 부서진 것도 아니고, 스스로 빛나며 폭발한 것도 아니다. 황량하게 시들어가는 지리멸렬한 죽음, 그것이 아카데미에 찾아왔다.” 연구ㆍ생활 코뮨 ‘수유+너머’가 지난 해 말 새해 강좌 ‘대중지성 프로젝트’를 꾸리면서 세상을 향해 내던진 ‘선언’은 사뭇 비장한 문구로 이어진다. “우울한 지식이 황혼을 맞고있는 사이, 즐거운 지식은 벌써 새벽을 시작하고 있다.”
아카데미의 죽음, ‘지리멸렬한 죽음’은 무엇에 근거한 진단이며, 또 이들의 강한 자신감은 어디에 기댄 것일까. 과연 이들의 ‘새벽’이 아카데미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을까.
강단 인문학에서 ‘죽음’의 징후는 오래 전부터 감지돼왔고, 다분히 자초한 죽음이라는 게 이들 ‘재야’ 인문학계의 지적이다. “경제 공황이 생산 부문에서 촉발됐듯 인문학 위기 역시 지식 생산자들이 야기한 것이다.”(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철학도들은 10년 전부터 논술강사를 하며 살아왔다. 내내 모른 척 하던 교수들이 이제 자기 밥줄 떨어질 것 같으니까 위기를 외치는 건 부도덕하다. 위기론은 지원금 타내려는 돈타령일 뿐이다.”(익명의 인문주의자)
‘위기론’의 실체는 교수의 위기이고 아카데미 권력 구조의 위기이지 학문의 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세상에 대해 묻고 답하는 학문, 곧 삶의 학문이잖아요. 강단 인문학은 삶과 분리된 지식이고 학문이었어요. 그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의 ‘문제’입니다.”(‘수유+너머’ 고병권 대표)
이들은 강단 인문학의 실체를 ‘세속화’와 ‘탈속화’의 이중적 편향으로 진단한다. 인문학을 부가가치를 위한 지식으로 스스로 전락시켰고(세속화), 닫힌 아카데미에서 지식을 생산해 자기 소비를 하고 있다(탈속화)는 것이다. “인문학 교수들이 지원을 호소하며 내세운 논거가 ‘인문학= 산업 기반’이라는 거였죠. 인문학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사회적 문제, 예를 들면 FTA나 새만금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어요.”(고병권 대표) DJ시절 지식 상품화를 유행시킨 ‘신지식인’의 탄생이 역설적으로 “지식인의 희극적 죽음”이었다는 비판도 있었고, “인문학과가 줄줄이 문화컨텐츠학과로 개명(改名)되는 뒤틀린 현상을 보라”는 지적도 있었다.
‘위기’는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아카데미 바깥의 인문 강좌마다 노소의 수강생이 몰려들고, 세미나마다 열정적인 젊은 연구진들로 북적이고, 성과들이 책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상을 보라고 말한다. “외면해요? 그건 대학 얘기죠. 인문학을 찾는 이는 언제나 소수였지만 언제나 있었어요. 근래에는 지적 욕구로 무장한 이들이 오히려 느는 추세예요.”
이들 익명의 지식 소비자들이 직접 생산에 간여하고 유통하는 시대, 곧 이들이 말하는 ‘대중지성시대’다. “FTA관련 논문을 쓰면서 미국-멕시코의 통상에 대한 어떤 자료를 구하지 못해 인터넷에 띄웠더니 한 네티즌이 ‘수출입은행 2003년 내부 토론자료’를 보내왔어요. 황우석 스캔들을 맨 처음 이슈화한 익명의 공학도들을 보세요. 뇌가 뉴런들의 링크로 작동하듯이 인간 네트워크가 지식을 생산하는 시대예요.”(고병권 대표)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던 과거의 기능적 지식인은 이 지식 권력의 시대에 이미 스스로 통치계급화하고 있다. 고위관료 가운데 전문 정치인을 제외한 절대 다수가 교수 등 지식인이고, 지난 해 국회의원 출마자 가운데 100여 명이 교수라는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식인 부재의 시대에 “지식은 아카데미의 강단이 아니라 대중적 네트워크를 타고 생산 유통 소비되고 있”(‘선언’ 중에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재야의 인문학이 과연 대안인가. 고 대표는 “대안이라기보다는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1980년대 아카데미 바깥에서 대학 제도권을 위협하며 맞서던 <연구실> 들이 90년대 들면서 제도권 속으로 대거 흡수됐어요. 그러니까 지금 제도권의 위기가 인문학 전체의 위기인 듯 착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도권과 따로 존재합니다. 이 ‘현상’들을 우리가, 또 그들(대학)이 어떻게 인문학적으로 분석하고 응답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연구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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