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교수형 소식으로 세밑이 한층 스산했다. 남달리 그를 동정해서가 아니다. 21세기 문명시대에 명색이 국가 지도자였던 인물이 외세 점령 아래 목이 매달려 처형된 것이 어처구니없다.
처형 장면을 널리 광고한 천박한 악의를 대하면서 독재 악행을 응징했다는 명분조차 공허하게 느꼈다. 그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이렇듯 졸속하고 야만적인 처형은 법과 정의에 관한 국제사회의 양식과 어긋난다. 유럽대륙을 유린한 나폴레옹도 외딴 섬에 유배한 문명사회의 척도를 일깨운 어느 외국 칼럼니스트의 식견이 돋보인다.
● 이라크 정체성 허무는 후세인 처형
후세인 처형으로 어떤 고상한 가치가 실현됐을까. 압제에 시달린 이슬람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복수심을 충족시키고, 후세인의 태생적 기반인 수니파와의 반목을 깊게 하는 빌미를 만든 것밖에 달리 긍정적 효과를 상상하기 어렵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미국이 국제여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기괴한 처형을 막후 연출한 의도는 뭘까. 부시 대통령의 말처럼 '후세인 없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면 순진하다.
후세인은 중세 상태에 머물던 이라크를 철권통치로 일깨워 이슬람 원리와 낡은 인습에서 벗어난 세속적 현대국가를 건설했다. 개인적 야망과 영웅의식에 도취한 탓에 민중의 복지보다 국가통합과 지역패권을 좇다 좌절했으나 이라크에 부정적 유산만을 남긴 건 아니다. 그런 후세인을 무력으로 타도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점령통치에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이라크의 국가적 통합과 정체성을 허무는 것이다.
후세인 처형은 국가 정체성의 마지막 상징적 고리를 끊는 작업이다. 이에 따른 내전 악화와 혼란은 식민지 경략에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세 통치를 뿌리 내리는 데 도움 된다. 미국이 노린 것은 이라크의 해체다.
사악한 독재자를 옹호하느냐고 불만스러운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진적 제3세계에 후세인과 같은 독재자는 산재했고, 다수가 지금도 미국의 비호 아래 건재하다. 아프리카로 건너가지 않더라도 이라크 주변의 친미 이슬람 국가들은 후세인의 이라크보다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독재와 악행 등의 좁은 틀에서 이라크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미국과 강대국들이 오직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화를 위해 전쟁과 살육과 파괴를 무릅쓴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도 이기적 국익을 좇아 파병 대열에 동참한 이라크 사태를 냉정하게 관찰하기가 겸연쩍거나 민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눈을 돌려 우리와 무관한 듯한 러시아와 외부세계의 에너지 갈등을 조망해 보는 게 좋겠다.
지난 해 정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천연가스 값 분쟁에서 비롯된 국제적 파문에 '에너지 분쟁으로 시작한 2006년'이라는 칼럼을 쓴 기억이 새롭다.
러시아는 이번에는 벨로루시와 비슷한 양상의 가격인상 다툼을 벌여 에너지 분쟁이 상습화하는 듯한 우려를 남겼다. 특히 서구 중심의 국제 언론은 분쟁의 성격을 러시아의 '에너지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러시아의 움직임은 소련시절 이른바 우호가격으로 값싸게 공급하던 천연가스를 국제시장 가격의 절반 수준으로 올리는 것에 불과하다. 우호관계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것은 여전하지만, 에너지 산업 전반의 국제 개방에 따른 시장가격 적용을 제국주의 행보로 비난하는 것은 악의적이다.
이런 악의적 선전의 바탕은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밑천으로 다시 국제 세력경쟁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도다. 중앙아시아 등의 에너지 자원을 놓고 갈수록 치열한 전략적 다툼을 벌이는 미국과 러시아와 중국 등의 움직임을 냉철한 눈으로 살펴야 한다.
● 선악구분 넘어 국익다툼 직시해야
이런 안목에서는 전직 러시아 정보요원의 방사성 물질 독살사건을 둘러싼 서구의 푸틴 대통령 비난 공세도 새로운 냉전적 세력경쟁의 단면이다. 강대국과 서구 언론이 흔히 선과 악으로 세상을 가르는 것을 넘어 이기적 다툼의 실체를 정확히 헤아려야만 우리도 험한 국제정치의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다. 정초에 굳이 스산하고 음울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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