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 30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단순히 은퇴 후에 오래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축복이 아니다. 환갑(還甲)이 되기 전 충분히 알곡을 모으고 건강을 비축했다면 '축복' 에 가까운 나머지 삶을 살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악몽'의 시간을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인들도 은퇴 후의 삶의 질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겨지는 시대를 맞고 있다. 오종남 전 국제통화기금(IMF) 상임이사는 " 한 개의 전공(專攻), 한가지 기술, 그리고 한 번의 기회가 인생을 전부 결정하는 시대를 이미 지났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는 통계청장으로 재직하며 각종 수치로 한국사회의 미래상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 워싱턴에 본부를 둔 IMF 상임이사를 지내며 세계 경제의 큰 틀로 고령화 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행복론을 두고 고민해왔다.
현재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일하는 그를 지난 연말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통계청장 재직시의 경험을 살려 펴낸 '한국인, 당신의 미래'에 이어 2탄 격인 '한국인, 당신의 행복'을 집필 중이다.
- '트리플 30년'의 개념으로 보면 단순히 은퇴 이후 자식에 의존해 사는 인생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받아들여졌던 환갑의 의미도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요.
"지난 60년대 우리 국민의 평균 수명은 52.4세에 불과했습니다. 이때는 환갑을 맞는다는 것 자체가 빈부를 막론하고 축복이었죠.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 이 수치는 80세를 넘어섰습니다.
환갑잔치는 고사하고 고희(古稀)잔치도 어색하기 짝이 없게 됐습니다. 이런 장수잔치 한다고 청첩장 보냈다가는 '웬 고지서냐' 며 핀잔을 듣기 일쑤입니다.
이렇듯 60세 이후에도 '젊은' 축에 속하고 무려 30년을 살아내야 하는 시대에 당면한 지금, 첫번째로 풀어야 할 숙제는 과연 자신이 나머지 30년을 불행하지 않게 살 수 있는 준비가 환갑이전에 되어있냐는 것입니다. 이 기로에서 자신 있게 '예스' 를 외칠 수 있도록 사회에 진출하는 순간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한'애프터 60세'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길어진 평균수명으로 설명이 됩니다. 과거와 달라진 사회구조, 예를 들어 저출산 시대를 살아가는 현 세대가 미래 대비에 앞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두 부부가 평생 낳는 아이의 평균 숫자가 6명을 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치가 작년 1.08명으로 뚝 떨어졌죠. 두 명의 부부가 둘을 낳아야 인구가 유지되는데 이보다 적게 낳다 보니 이들의 아이는 모두 왕자 아니면 공주로 대접 받고 살아갑니다.
아이들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명령'에 따르는 '부하'가 양가 조부모까지 6명에 달하죠. 이렇게 곱게 자란 아이가 30세가 될 무렵 부모와 조부모는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대부분 생존에 있게 되지만 경제력이 약해집니다.
합계출산율이 6명을 오가던 시절의 시각이라면 이 아이가 이들 부모를 모셔야 하겠죠. 하지만 아이는 부양의 짐을 나눠 가질 형제가 없기 때문에 부모들의 남은 여생을 책임질 수 없고 사회나 어떤 윤리적인 항목도 이를 강제하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평균수명이 짧고 돌봐줄 자식의 수가 많아 '자식보험'에 의지해서 여생 계획을 짜도 별 무리 없었지만 지금 이후로는 오직 자신이 준비한 '자기보험'으로 지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자기 보험'을 준비한다는 게 매월 비슷한 수입으로 가족을 꾸려가는 대부분의 샐러리맨에겐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축을 충분히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여윳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한국인은 자신의 행복보다 자식의 행복에 방점을 찍고 인생을 살아가는 성향이 뚜렷합니다. 때문에 자신의 노후와 인생계획을 전부 포기한 채 자식교육에 모두 '올인' 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살아갑니다.
준비된 사람으로 남고 싶다면 올인을 절반으로 뚝 자르세요. 그래서 그 나머지를 자신의 노후에 투자하십시오. 이것이 자기 보험의 종자돈이 됩니다.
이를 위해선 일단 자녀의 진로를 생각하는 기준을 재점검해야 합니다. 최소 10년 뒤 사회에 나서는 자식의 진로를 이미 수 십년 전의 경험으로 무장한 부모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무조건 의사, 법조인 등을 만들어야 한다는 구습과 고정관념이 불필요한 양육비를 쏟아 붓게 만듭니다.
자식의 진로결정은 전문가들에 맡기고 여기에 들어갈 재력과 정력을 자기 보험으로 돌리세요. 이 정도만 해도 환갑 때 남은 여생을 '악몽'으로 받아들이는 처지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어진 수명만큼 행복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풍족한 노후를 맞는다고 반드시 행복에 이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트리플 30년'으로 꾸려가는 인생에 있어 추구해야 할 행복은 어떤 모습일까요.
"제가 '행복지수' 라는 것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행복지수는 자기가 '원하는 것' 분에 '가진 것'으로 계산합니다. 가장 행복한 상태는 이 두 개의 변수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원하는 것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행복지수 1' 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칭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많은 이들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간과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원하는 것'의 구조 조정입니다. 가진 것을 늘려 행복한 수준에 도달하려고 하지 원하는 것을 줄여 행복에 이르는 방법은 궁리하지 않습니다.
행복지수를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은 '나눔' 입니다. 제가 미 워싱턴에서 매주 행복론 강의를 할 때였는데 한 노인이 '저는 바라는 것보다 가진 게 많아서 행복지수가 1을 넘습니다' 고 말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남는 만큼을 덜어내도 똑같이 행복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답하셨습니다. 저는 '남는 만큼'을 덜어내도 행복의 값어치가 떨어지지 않는 다는 노인의 말에서 바로 '나눔'의 가치가 설명된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것을 구조조정하고 자신이 넘치게 가진 것을 나눌 때 비로소 행복지수가 최고 치에 달하는 것입니다."
- 저소득층 다수의 고령인구는 별 수 없이 '준비되지 못한' 노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미 기회를 놓친 이들에게 어쩌면 '트리플 30년'의 행복은 신기루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들이 행복한 노후를 개척할 방법은 과연 있을까요.
"사실 우리나라는 절대빈곤 상태를 넘어선지 오래됐습니다. 1973년에 처음으로 국민 한 명이 하루를 연명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1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이때부터 유엔이 정의하는 '빈곤국가'를 탈출한 것으로 봅니다. 쉽게 말해 국민 대부분이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1995년 드디어 1인 당 국민소득 1만 달러 고지를 달성했으며 IMF 위기 시절 다시 6,700달러까지 떨어졌던 소득이 지난 해 1만6,000달러로 재도약했습니다. 지금 앞에서 말한 '준비된 자'의 수준에 오르지 못해 경제적으로 남은 여생을 불행하게 보내야 할까요.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을 볼 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절대빈곤층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100만원 정도의 지원이 국가로부터 이뤄집니다. 여가를 남들처럼 즐기고 자기계발을 할 경제수준은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입에 풀칠하는 걱정에서 탈출한 것은 사실입니다. 행복은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다고 느낄 때 가난해지고 부유하다고 느끼고 자기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선선히 내줄 때 진짜 행복을 갖게 됩니다. 보다 나은 '라스트 30년'을 위해 재정적으로 준비를 하라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마음먹지는 마세요."
-행복의 수위에 다다르기 위해선 거의 대부분의 경우'성공'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트리플 30년'의 렌즈로 인생을 보아도 이러한 공식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길어진 여생을 성공으로 이끌 노하우가 필요할 때입니다.
행복의 정점에 다다르는 데 큰 지렛대가 되는 것이 성공입니다. 성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공이란 내가 그 자리에 있으므로 해서 그 자리가 빛날 때, 또한 내 주변의 사람이 행복해질 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루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청앞 가로를 매일 새벽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과거 일했던 어떤 환경미화원보다 깨끗한 거리를 만들었다면, 그래서 자기의 자리인 거리가 빛났고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줬다면 그는 비록 시청 청사에 계신 시장보다 낮은 지위에 있지만 그보다 더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공에 이르려면 자신이 현재 속해있는 자리가 아무리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도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래야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기회가 찾아 옵니다. 오늘은 단순한 정거장이 아닙니다. 10년 후 당신의 모습을 머리에 담고 매진하면 어느새 성공의 종착역에 도달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당신이 맞이할 미래는 평균 90년입니다. 이 긴 시간동안 성공과 행복을 이루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닙니다.
● 오종남 프로필
- 1952년 전북 고창 출생
- 197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 1975년 행정고시(17회)
● 주요경력
-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방송운영 부단장
- 재정경제원 대외경제총괄과장
- 대통령 정책3비서관
- 통계청장
- 국제통화기금(IMF) 상임이사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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