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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대선주자 라이프 스토리-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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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대선주자 라이프 스토리-정동영

입력
2006.12.3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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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사라졌어요! 흙먼지가 가라앉으니까 건너편에 있는 사법연수원이 보여요.” 1995년 6월29일 오후 6시께. MBC 보도국에 전화를 한 여성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정동영 기자는 믿기지가 않았다.

사고 현장을 취재하며 내내 울먹였다. 대한민국 상류층이 사는 강남 복판의 삼풍백화점이 신기루인양 쓰러진 것은 우리가 허겁지겁 쌓아온 정치 경제 사회 구조도 어느날 갑자기 형체도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한번도 흐르지 않고 고여 썩는 낡은 리더십을 털어내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다음해인 96년, 18년 방송생활을 정리하고 야당 정치인이 됐다. 정권교체를 위해 벽돌 한 장 쌓겠다는 심정이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삶은 그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몽골기병’을 연상시킨다. 역동성과 도전정신이 그의 삶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대중을 휘어잡는 화려한 언변, 총선 사상 최초의 2연속 전국 최다득표, 40개월간 대변인직 3번 연임, 여당 사상 최연소 최고위원, 정치입문 10년차에 유력 대선후보도 그래서 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전북 순창의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9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형 4명을 질병으로 잃고 장남이 된 것과 고교시절 부친이 돌아가신 뒤 어머니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옷장사를 한 일, 유신반대 시위로 두 차례 감옥살이를 한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1973년 그가 수감되자 어머니가 상경, 성동구 사근동의 셋방에서 재봉틀로 생계를 이어갔다. 정 전 의장은 출소 후 원단과 실, 단추를 사 나르고, 박음질을 하고, 새벽이면 아동복 바지를 보따리에 싸 들고 시장으로 나갔다. 짐 꾸러미를 든 모친이 만원버스에 올라타다 안내양에 떠밀려 길바닥에 내팽겨쳐진 장면을 떠올릴 때 그는 눈시울이 젖는다.

결혼과정에선 특유의 추진력이 엿보인다. 이미 퇴짜를 맞았지만 대학 졸업 후 전주에서 음악교사를 하던, 민혜경씨를 다시 찾아갔다. “기자라서 사윗감 삼기 어렵다”는 답을 듣자 방송국에 사정을 설명하고 사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곤 설악산으로 민씨를 ‘납치’한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는 탁월한 정치감각과 추진력을 지녔다. 정치인으로서 일대 도약한 것은 2000년 12월의 ‘민주당 쇄신파동’을 거치면서다. 혹자는 ‘정동영의 쿠데타’로 평한다. 그는 국정난맥의 원인이 동교동계의 전횡에 있다며 정점에 있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2선후퇴를 요구했다. 12월2일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초선 의원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일을 저지른 것. 결국 초ㆍ재선 의원들이 그를 지지하면서 권 전 고문이 최고위원직을 사퇴했고, 이것이 동교동계 구주류 몰락의 단초가 됐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며 거침없이 달리던 그는 2004년 총선 당시‘노인폄하 발언’과 지난해 5ㆍ31 지방선거 참패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뼈아픈 경험이 보약이 될 수 있을까. 그는 지금 부동산ㆍ교육ㆍ중소기업 정책개발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지리멸렬하고 있는 여권이 정동영의 역동성을 다시 찾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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