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노력하면 성공” 7% 뿐직업 선택은 ‘보수’ 보단 ‘안정’“경제 부담땐 통일 미뤄야” 많아해결 과제, 빈부격차 해소·경제 활성화 順꼽아
2007년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은 지 10년째 되는 해다. 외환위기 그후 10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외환위기는 대량 실업과 연쇄 부도 등 한국 사회에 엄청난 경제적 충격파를 던졌을 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상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은 외환위기가 우리 국민들의 구체적인 삶과 가치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취업포털 커리어에 등록된 만 20세 이상 구직자와 우리ㆍ외환은행, 대한생명 등 3개 금융기관 직원 등 2,728명을 설문 조사했다. 직장인과 구직자를 조사 대상으로 잡은 것은, 이들이 외환위기의 충격을 최일선에서 맞았고 지금도 고용불안과 높은 실업률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10년의 고단한 삶을 보낸 이들의 직업과 사회에 대한 의견은 예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개인의 성공조건은 ‘돈’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성공조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자 2명 중 1명(53.7%)은 ‘돈(재력)’을 꼽았다. 재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성공의 척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돈이 돈을 번다’는 식의 사고는 전통적으로 거액 자산가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일(노동)을 통해 사회적 성취를 이뤄야 할 직장인과 구직자들까지 ‘성공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개인의 성공조건 2, 3위 역시 ‘적성과 소질에 맞는 직업선택’(11.7%), ‘인간관계와 같은 처세술’(11.7%) 등 현실적인 요소들이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답변은 4위(7.3%)에 불과했다.
직업선택의 기준에 대해선 절반 이상(56.7%)이 ‘안정적인 직업’을 첫 번째로 꼽았다. 2위는 ‘보수 수준’(19.4%)이었고, 업무환경이나 자아실현 기회 등을 대변하는 ‘업무수행의 자율성’(11.8%), ‘승진 기회(2.9%) 등은 우선순위와 거리가 멀었다. 보수는 많지 않아도 직업 안정성이 뛰어난 교사 공무원 등이 인기를 더해가는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셈이다.
평소 일자리를 잃을 지 몰라 느끼는 불안감의 정도 역시 ‘보통’을 넘어섰다. ‘매우 낮다’를 1점, ‘낮다’를 2점 등으로 매겨 ‘매우 높다’(5점)까지 5단계의 지수를 평균한 수치는 3.6으로 ‘높다’인 4점에 가까웠다. 통계상으로 높아진 실업률과 함께 일반인들이 평소 느끼는 실직 스트레스 역시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 제1의 과제‘빈부격차 해소’
현재 우리 사회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10명 중 3명 꼴로 ‘빈부격차 해소’(31.1%), ‘경제 활성화’(30.9%)를 지적했다. 정치권의 반목과 다툼이 경제와 사회분야 발전의 발목을 잡는다는 문제의식도 여전해 ‘정치인의 자질개선’(19.8%)이 3위에 올랐다. 우리 국민들의 단골 관심사인 ‘통일’(0.7%) ‘환경보호’(0.6%) ‘안보’(0.5%) 등을 꼽은 비율은 1%도 안됐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해 ‘우리 모두를 위한’ 전통적인 명제에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엿볼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부정적이었다. 한국이 5년 안에 선진국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매우 낙관한다’고 답한 비율은 불과 2.4%인 반면, ‘약간 비관한다’ ‘매우 비관한다’ 등 비관적 응답(60.6%)이 낙관론과 중립론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희석
한국 사회에서 재벌은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악덕’의 이미지가 강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특히 그랬다. ‘문어발식’ 또는 ‘선단 경영’ 따위의 비유와 함께 중소기업의 목줄을 죄고 노조를 탄압하는 ‘포악한 공룡’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이 같은 인식은 비록 재벌기업을 직장으로 가졌거나 취직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선 재벌에 대한 직장인과 구직자들의 부정적 인식이 상당히 희석된 것으로 나타났다. 재벌에 대한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 2명 중 1명(49.3%)은 ‘보통이다’에 표를 던졌다. 물론 재벌에 대한 인상이 ‘나쁘다’는 의견이 36.6%로 ‘좋다’(18.2%)보다 두 배 가량 높았지만, 중립 의견이 많아진 것은 ‘재벌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선입견이 상당부분 무뎌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외환위기 이후 ‘코리아’라는 국가보다는 ‘삼성’ ‘LG’ ‘현대’ 등 국제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우리나라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자본주의’ 하면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로는 ‘경제성장(18.1%)’, ‘풍요’(7.0%)와 같은 긍정적 인상보다 ‘빈부격차’(35.3%), ‘생존경쟁’(32.9%) 따위의 부정적 인상이 앞섰다.
경제에 부담되면 빠른 통일 ‘반대’
그동안 한국 사회의 당위로 여겨졌던 명제들에 대해서도 직장인과 구직자 계층은 현실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나라가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전쟁 위협을 줄이기 위해서’(35.8%),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29.8%)’가 각각 1, 2위를 기록했다. 오랜 세월 우리 국민의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던 혈연적 동질감(‘같은 민족이기 때문에’ㆍ27.1%)은 3위에 머물렀다. 한 핏줄과의 공동번영을 꿈꾸던 당위론적 의식이 이제는 ‘내가 사는 사회의 이익’을 앞세우는 현실론에 자리를 내준 셈이다.
통일비용 등의 부담으로 경제가 나빠져도 가급적 통일은 빨리 이뤄지는 게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반대’(45.5%)가 ‘찬성’(35.2%)을 앞질렀다. 국산품 애용에 대한 당위론도 무뎌졌다. 품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국산품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반대’(37.8%)가 ‘찬성’(26.6%)을 여유 있게 앞지를 정도로 냉정해졌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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