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파리 드골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급히 귀국하라’는 전갈을 대사관을 통해 받은 참이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평범한 여자로 살수 있었을 22살의 박근혜. 이후 30여년간 전개될 파란만장한 삶의 드라마를 그 역시 당시엔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귀국한 그에겐 더 이상 울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당장 영부인 대행의 역할이 주어졌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산업현장을 방문했고 국토시찰에 나섰다. 차 안에서, 식탁에서 아버지와 토론하며 배웠다.
누구보다 일찍 국정을 조망하며 지도자 수업을 쌓은 것이다. 이전 청와대 생활이 어머니 육영수로부터 부드러운 여성을 배운 시기였다면 그때부턴 아버지로부터 강인함을 배웠다. 두각을 나타낸 것은 외교 분야였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그는 한국을 방문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과 만났다. 그는 4개 국어를 한다. 미국 카터 대통령 부인 로잘린 여사에게 ‘한국적 민주주의’를 능숙한 영어로 설명했고,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과 아버지와의 회담을 직접 통역했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미국 일본 중국 등지를 방문하며 그가 받은 외교적 환대는 이 시기 쌓은 인연과 내공의 결과물이었다.
79년 10월26일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근혜는 졸지에 양친을 모두 흉탄에 잃은 27살의 처녀 가장이 됐다.. 세태는 냉혹했다. 충성을 맹세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권력을 잡은 신군부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를 미행, 감시했고, 측근을 삼청교육대에 보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위로 배신감과 허무감이 엄습했다. 그는 자택에서 은둔했다. 당시 그의 심정을 잘 보여주는 80년 2월 일기의 한 대목이다. “혹서 혹한 비바람 눈 안개…인생행로를 무척 많이 닮은 것이 날씨다.”
그가 여기서 좌절 했다면 지금의 박근혜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썼고, 사색했다. 고난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며 이겨냈다. 남동생 지만씨는 마약에 빠져들었고, 서영씨도 이혼 등 순탄치 않은 인생 행로를 보였다. 그가 92년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그런 생은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 모른다. ” 박근혜는 최근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동생들이 정상이었지요.”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측근들은 그에게서 수도자의 풍모가 풍겨 나온다고 했다. “지금의 박근혜를 만든 것은 청와대 시절 18년이 아니라 외롭게 수행하면 보낸 18년의 삶”이라고 한 측근은 단언했다.
1997년 12월 박근혜는 한나라당에 전격 입당하면서 세상으로 다시 나왔다. IMF 먹구름이 나라를 뒤덮고 있던 시기였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그는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이듬해 그는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 금배지를 달았다.
정치인으로 돌아온 박근혜는 제왕적 총재 이회창과 싸우면서 자신을 키워갔다. “이 총재 사당화는 곧 망하는 길”이라며 당 개혁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이 총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2년2월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 비록 7개월만에 한나라당과 합당, 다시 돌아오지만 이회창 대세론이 엄존하던 시기, 이회창에게 등을 돌리고 탈당한 것은 분명 보통 배짱은 아니었다.
2004년 3월23일, 그는 한나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된다. 그의 한마디는 잠실체육관을 메운 대의원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17대 총선. 차떼기와 탄핵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한나라당에게 그는 121석이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안긴다. 그후 그는 박풍을 몰고 다니며 각종 선거 기적을 만들어냈다. 피습테러를 딛고 일궈낸 5ㆍ31지방선거 압승은 선거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명장면이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이정현 공보특보는 “철저하게 자신을 버렸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제, 박근혜는 2007년 12월 또 한번의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한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동훈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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