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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처형…이라크 긴장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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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처형…이라크 긴장 고조

입력
2006.12.3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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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현지시간) 사형이 집행된 사담 후세인(69) 전 대통령의 장례가 31일 완료됐으나 이라크에서는 산발적으로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등 종파간 폭력사태 확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라크 정부는 30일 오전 6시께 수도 바그다드 카디미야의 이라크 군 기지에서 두자일 주민 학살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후세인 전 대통령에 대해 교수형을 집행했다. 이라크 정부는 후세인 처형 과정을 촬영한 영상을 국영 알 이라키야 TV 등을 통해 공개했다.

후세인 전 대통령은 1982년 자신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던 두자일 마을의 시아파 주민 148명을 학살한 혐의로 11월5일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지난 26일 최고항소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불과 나흘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79년 대통령이 된 후세인은 2003년3월 미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권좌에서 축출됐고 그해 12월 고향 티크리트에서 미군에 생포됐다.

30일 하루 이라크에서는 시아파 주민을 겨냥한 연쇄 폭탄테러로 80여명이 사망하는 등 폭력 사태가 잇따랐다. 바그다드의 시아파 거주지 사드르시티에서는 3건의 차량폭탄 테러로 37명이 숨졌고,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 인근 쿠파에서도 폭탄을 장착한 미니버스가 수산시장에 돌진해 31명이 목숨을 잃었다. 때문에 후세인을 지지하는 수니파 저항세력의 보복 공격이 격화할 것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시아파 출신의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후세인 처형 직후 성명을 발표, “후세인 처형으로 이라크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가 끝났다”고 밝혔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후세인 처형은 이라크가 민주국가로 가는데 중대한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러나 “이라크를 내전으로 밀어붙이는 종파간 폭력사태가 끝난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랍ㆍ이슬람권과 유엔, 로마 교황청, 유럽 국가들은 후세인에 대한 사형 집행을 비판했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후세인 사형집행 현장

이슬람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희생제)의 동이 틀 무렵인 30일 오전 6시께, 사담 후세인(69) 전 이라크 대통령이 교수대에 섰다. 검은 코트 차림의 후세인이 복면을 한 집행관 3명에 의해 호송돼온 곳은 바그다드 미군 특별경계구역 ‘그린존’을 벗어난 카디미야의 이라크군 기지. 과거 자신의 집권 시절 숱한 반체제 인사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자리다. 집행관들은 ‘사형수’ 후세인에게 검은 두건을 씌우려 했으나, 그가 거부했다. 후세인의 목에 곧 굵은 밧줄이 걸렸다. 잠시 후 후세인은 흰 천으로 감싼 싸늘한 시신이 돼 차가운 바닥에 눕혀졌다.

후세인 사형이 집행된 지 몇 시간 뒤 이라크 국민들은 국영 알 이라키야 방송 등 TV를 통해 그의 최후를 확인했다. 이라크 정부가 공개한 영상에는 교수대에 매달려 숨이 끊어지는 10여분을 제외한 후세인의 처형 과정이 모두 담겼다. 미군으로부터 후세인의 신병을 인도한 지 불과 수시간만에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한 이라크 정부는 “이슬람과 국제기준에 맞춰, 후세인의 뜻을 존중하며 사형이 집행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랍어 위성방송 알 자지라와 아랍권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고 있는, 후세인의 처형 순간을 휴대폰으로 촬영한 또 다른 동영상은 형장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교수대에 매달리기 직전, 후세인이 자신을 모욕하는 집행관들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이 담겨 있다.

후세인은 사형수에게 씌우는 두건과 이슬람 성직자 입회를 거부하는 등 죽음 직전까지도 자존심을 지키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후세인의 태도에 대한 증언은 엇갈리고 있다.

처형에 입회한 무니르 하다드 판사는 BBC방송에 “후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형장에 끌려온 후세인은 “두렵지 않느냐”는 집행관들의 물음에 “나는 평생을 이교도와 침입자에 투쟁하는 전사로 살았다. 따라서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후세인은 손발이 묶인 채 교수대에 오른 뒤에는 코란의 경구를 암송하며 “신은 위대하다”면서 이라크인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구하는 한편 미국에 계속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하디다 판사는 후세인이 자신을 조롱하는 집행관들에 대한 비난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숨졌다고 전했다.

반면 무와파크 알 루바이에 이라크 국가안보보좌관은 “후세인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CNN에 말했다. 루바이에 보좌관은 “후세인은 침착하게 교수대로 걸어갔지만, 구호를 외치고 난 뒤 점점 무너져갔다”고 전했다.

후세인은 올가미가 당겨지고 10분가량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가, 6시10분께 의사에 의해 사망이 선언됐다. 로이터통신은 처형에 약 25분이 걸렸으며 입회인들은 후세인의 목이 부러지는 소리도 들었다고 전했다. 후세인 사망 직후 시아파가 대부분이었던 정부 입회인들은 춤을 추며 환호를 올렸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죄목, 두자일 마을 시아파 무차별 처형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범죄혐의는 두자일 학살사건이다. 1982년 7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시아파 거주 두자일 마을의 주민 148명을 처형한 사건을 말한다.

후세인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3년 만인 그 해 7월 8일 두자일 마을을 방문한 후세인 차량 행렬이 괴한의 총격을 받은 것이 발단이 됐다.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전쟁 중이었고,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정적 숙청 작업을 본격적으로 벌이고 있던 후세인은 이 암살사건을 반대파인 시아파 정치세력이 조직적으로 꾸민 것으로 단정하고 범인 색출에 나섰다. 이라크 정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을 전체 주민 600여명을 사막의 수용소로 연행해 고문을 자행한 뒤 겨우 2주 동안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무려 148명을 처형했다.

두자일 학살은 그의 잔혹한 철권 통치 기간 저지른 비인도적 범죄들의 서막에 불과했다. 후세인은 이 사건을 포함해 87~88년 쿠르드족 수천~1만명을 화학무기로 학살한 ‘안팔(전리품) 작전’ 지시, 이란ㆍ이라크전에서 화학무기 사용, 90년 8월 쿠웨이트 침공, 91년 1월 시아파 봉기 무력진압, 집권 30년 동안 반체제 인사 살해 등 모두 8가지 혐의에 대해 기소된 상태였다.

이중 특히 후세인 시절 최대의 학살인 안팔 작전에 대한 재판이 4개월째 진행되면서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과 갖가지 증거가 제시되기 시작했는데 사형이 집행됨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쿠르드족 주민이 후세인의 처형에 기쁨을 표시하면서도 “완전한 심판이 내려지지 않았다”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두자일 학살을 지시한 혐의로 처형됨에 따라 후세인은 반(反)인도 범죄로 사형당한 극소수 통치자 중 하나가 됐다. 역사적으로 독재자가 재판을 받은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자국 내 민중봉기나 쿠데타 등으로 정부가 전복된 경우를 제외하면 사형 판결이 내려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 학살 등 국제법에 어긋나는 비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국내 재판소가 아닌 유엔 국제전범재판소의 재판을 받는 것이 보통이어서 미군 점령 하 후세인 재판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79년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군부 쿠데타로 실권한 뒤 정적 살해 혐의로 사형을 당했으나 이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89년 10월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세스쿠가 민중봉기 이후 학살 등의 혐의로 사형을 당했지만, 사형을 언도한 특별 군사법정의 재판은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즉결 심판에 가까웠다.

대부분 다른 독재자들은 사형 집행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숨졌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니카라과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콩고의 독재자 로랑 카빌라 등은 반대파나 민병대 등에게 사살됐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은 전범재판이 진행 중이던 올해 3월 유엔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장 캄반다 전 르완다 총리는 학살 혐의로 유엔 전범재판에서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는 미국 법원에서 마약 운반혐의로 40년형을 받았지만 비인도 범죄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3년전 죽은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인 티크리트에 묻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숨진 지 24시간 이내에 장례를 치르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 고향인 북부 티크리트로 돌아가 묻혔다.

AP통신 등은 후세인의 시신이 사형 집행 22시간 만인 31일 새벽 4시께 티크리트 변두리의 고향 마을 오우자 중심가의 이슬람 시설에 매장됐다고 보도했다. 티크리트는 점령 미군과 시아파 주도 이라크 정부에 반대하는 수니파 저항세력의 거점으로, 후세인은 2003년12월13일 티크리트 인근에 숨어있다가 미군에 체포됐었다. 후세인이 묻힌 곳에서 3㎞거리의 마을묘지에는 2003년7월 모술에서 미군과의 교전으로 사망한 후세인의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도 묻혀 있다.

후세인 장례는 출생 부족인 알부나시르족 대표인 알리 알 니다, 친척 무사 파라지 등 마을 대표 몇 명만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후세인 처형 직후 이라크 정부는 티크리트에 4일간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군경이 도시를 봉쇄, 후세인 지지자들이 티크리트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장례 소식이 알려진 후 수천명의 후세인 지지자들은 출입 봉쇄선을 뚫고 티크리트로 몰려들어 복수를 다짐하는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앞서 후세인의 장례가 언제 어디서 치러질지를 두고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후세인의 가족들은 처형 직후 성명을 통해 후세인이 변호인 접견에서 수니파 저항세력 거점인 라마디에 묻히기를 희망했다고 밝혔다. 또 요르단 수도 암만에 거주하고 있는 맏딸 라그하드는 “‘이라크가 해방될 때까지’ 아버지 시신을 예멘에 모시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세인 시신은 처형된 지 몇 시간 만에 고향 대표단에 인도돼 미 공군기에 실려 고향으로 향했다. 알부나시르족 측은 알 자지라 방송에 “후세인의 시신이 오우자에 있으며 사망 당일 매장하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서 매장한다”고 티크리트행을 확인해주었다.

이라크 정부는 후세인의 묘가 수니파 저항세력의 순례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세인의 매장지를 비밀에 붙이려는 계획도 세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BBC방송은 이라크 정부가 후세인 무덤의 성지화를 크게 우려하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문향란기자

파란만장 일생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세력을 물리친 이슬람의 영웅 살라후딘(살라딘)처럼 서방세계와 대항하며 아랍의 패권을 손에 쥐려던 야심 많은 독재자였다. ‘전쟁광’과 ‘아랍 민중의 영웅’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 그는 사실상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컸고, 결국 미국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1937년 4월 28일 바그다드 북쪽으로 150㎞ 떨어진 티크리트시 변두리에서 태어난 후세인은 생후 8개월 만에 고아가 돼 외삼촌에게 길러졌다. 18세 때 바그다드로 상경,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56년 반정부 봉기를 계기로 이듬해 범아랍 사회주의 부흥당인 바트당에 입당한다. 쿠데타와 대통령 암살 모의 등에 참여했던 그는 외국 도피, 수감생활 등을 하다 68년 바트당의 재집권 계기가 된 쿠데타에서 핵심역할을 한 뒤 마침내 79년 이라크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다.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꿈꾸던 후세인은 80년 9월 이란ㆍ이라크전을 일으킨다. 초반 이라크가 이란에 밀리자 미국은 물류와 기술뿐 아니라 이란군의 이동정보와 무기까지 이라크에 제공했다. 82년 미국은 이라크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했고, 83년 11월 미 국가안보회의(NSC)는 이란의 승리를 막기 위해 ‘합법적이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놓기도 했다. 그해 12월에는 나중 조지 W 부시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맡아 후세인을 파멸로 내몬 도널드 럼스펠드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특사로 후세인을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럼스펠드는 유엔이 이라크가 이란에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날인 이듬해 3월 24일에도 이라크를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랍권은 미국이 후세인 재판을 더 진행할 경우 당시 미국이 화학무기를 이라크에 제공했다는 의혹이 불거질 수 있어 처형을 서둘렀다는 분석도 내 놓는다.

88년 이란과 휴전협정을 맺은 뒤 전쟁에 따른 외채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90년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괴물’을 키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91년 1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을 결행,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냈다.

잇따른 실정에도 불구하고 후세인은 95년과 2002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100%에 가까운 압도적 찬성으로 대통령직을 이어갔다.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철권통치 때문이었지만, 이라크를 100만명의 군사력을 가진 중동의 군사강국으로 변모시키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어깨를 견주는 산유국으로 키운 공로를 인정 받기도 했다.

유엔의 경제제재 등 국제적 고립, 미국 및 영국의 군사적 압박에 시달리던 후세인은 결국 9ㆍ11 테러 이후 아들 부시 대통령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뒤 두 아들을 공습으로 잃고 권좌에서 쫓겨나 도망자가 됐다. 세대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부시 부자와 충돌했던 그는 결국 같은 해 12월 고향 티크리트의 농가 토굴에서 미군에 체포됐다. 이듬해 이라크 정부로 인계된 후세인은 2005년 이라크 특별법원에 기소됐다. 이 달 26일 최고항소법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됐다.

최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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