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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대선주자 라이프 스토리-손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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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대선주자 라이프 스토리-손학규

입력
2006.12.3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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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1947년 경기 시흥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0남매 중 막내였다. 세 살 때 교사였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지독한 가난이 시작됐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교사를 그만 두고 똥 지게를 지고 밭을 메는 억척 여인으로 변신했던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눈가는 축축해진다.

손 전 지사는 경기중ㆍ고를 거쳐 1965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조영래 변호사(작고)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삼총사’로 불렸다. 두 번 무기정학을 받은 끝에 졸업할 무렵, 그는 “서울시내 전깃불을 다 꺼버려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한국전력 입사시험을 봤다 떨어질 만큼 저돌적이었다.

졸업 이후 그는 노동운동을 위해 구로공단으로, 빈민운동을 위해 청계천 판자촌으로 옮겨 다녔다. “민중과 함께 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수배자로 도망 다니느라 어머니의 임종도 못 지켰다. 1977년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체포될 때 보안대와 시경에서 나온 7대의 지프차가 운구 행렬을 뒤따랐다고 한다. 그는 요즘도 “하늘나라에선 이념 대결 때문에 고통 받는 일은 없겠지요”라고 하늘의 어머니에게 묻곤 한다.

손 전 지사 때문에 눈물 마를 날 없었던 또 한 명의 여인, 아내 이윤영씨다. 대학교 때 만나 7년 만에 결혼할 때까지 감옥 1년, 군대 35개월간 한 살 연하인 손 전 지사를 묵묵히 기다렸다. 결혼 이후 약국을 운영해 변변한 수입이 없는 남편 대신 생계를 돌본 것도 이씨다. 손 전 지사는 “수배자 시절 공중전화로 ‘꿈길 밖에 길이 없어’라는 노래를 불러 주다 울음바다가 되곤 했다”고 회고했다.

1979년 10월26일, 손 전 지사는 경남 김해 보안대에서 유신의 종말을 맞았다. 부산에서 체포돼 만 사흘간 고문을 당하던 그는 서울에서 내려온 중앙정보부 수사반장을 보고 절망했다고 한다. “사형이구나.” 하지만 수사반장이 전한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고 소식이었다.

1980년 민주화가 오는 길목에서 그는 돌연 영국 옥스포드대로 늦깎이 유학을 떠났다. 주위에선 “이제 우리들 세상인데 어딜 가느냐”고 말렸지만, 그는 “투쟁으로만 살아온 터라 머리를 채우고 싶다”고 뿌리쳤다.

7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 온 그는 재야로 돌아가는 대신 인하대와 서강대 교수로 다른 인생을 시작했다. 1993년 여당인 민자당의 요청으로 경기 광명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나서 당선된 뒤 내리 3선을 했고, 보건복지부 장관도 지냈다. 2002년엔 경기도지사가 돼 임기 4년간 지구를 열 바퀴 도는 ‘땀의 기록’을 썼다. 141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고 일자리 8만개를 만들어 냈다.

손 전 지사가 이따금 떠올리는 1963년 화창한 봄날의 한 장면. 한 소년이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에 올랐다. 서울을 내려다 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게 바로 내 세상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대한민국이다!” 손 전 지사는 그 때 그 열일곱 살 소년의 다짐을 되새기며 오늘도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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