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서(38)씨는 등단한 지 10년 된 시인이다. 올해는 <코르셋을 입은 거울> (천년의시작)이라는 시집도 한 권 냈다. 그런 그가 동시의 꿈을 품게 된 건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 흙 좀 밟아보라고 4년 전 내려간 청주에서 숲길을 산책하고, 도마뱀을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동시가 터져나왔다. 코르셋을>
시인일 때 그는 어두웠다. 지독히 어둡고 병리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시들이었다. “제 시는 너무 깜깜하고 어두워서 불을 켜놓고 봐도 안 보일 정도예요.(웃음) 하지만 동시를 쓸 땐 마음이 상쾌해져요. 내 안의 또 다른 아이를 만나게 되니까 나 자신이 재밌어지죠. 아이들의 힘인 것 같아요.”
밝고 즐거운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그에게 아이들은 동시 선생님이 돼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뒹굴다 보면 온갖 시름을 잊고 아이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울과 절망을 버리는 훈련을 하게 된 그에게 동시는 이제 따로 작업할 필요가 없는 생활의 한 부분이다.
지난 3년 동안 틈틈이 써둔 동시가 100여 편에 달하는 ‘기성 시인’이지만, 그는 동시 당선은 생각지도 않았다고 한다. “내가 될까 싶어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성인문학 하는 사람들이 아동문학을 쉽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제가 해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본심 심사평에 후보로 거론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했는데, 너무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는 “올 한 해 집안에 우환이 많았는데 이번 당선으로 큰 위로를 받았다”며 “내년에는 좋은 일, 웃을 일만 생길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그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환상적 동시를 쓰고 싶다고 한다. “뭔가 가르치려고 하는, 힘이 들어간 동시는 배제하고 싶어요. 교훈이 없더라도 상상력을 키워줄 수 있는 재미있고 발랄한 동시를 많이 쓸 생각입니다. 이제는 코르셋을 벗고 다른 밝은 색깔을 좀 찾아보고 싶어요.”
[당선소감] 5살·7살 두 아이가 '내 동시의 절반'
겨울도 아닌데 사계절을 겨울처럼 보내며 고민이 많았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뒤엉켜 좀처럼 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쪽을 당기면 저쪽이 엉키고 저쪽을 당기면 이쪽이 엉켰다. 매일 창가에 앉아 실마리를 찾았다. 실마리는 쉽게 잡힐 듯 쉽게 잡히지 않았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은 너무 자주 각도가 바뀌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앉은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 저녁. 전화벨이 울렸다.
나보다 의자가 먼저 환하게 웃어주었다. 난간에 앉아 있던 참새가 환호성을 질렀다. 빨래들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영문도 모르면서 구름도 웃어주었다.
동시를 쓰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5살 효림이, 7살 석현이와 그림책을 읽다 혹은 산책을 하다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예쁜 동시가 되었다. 아이들은 내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변화시켰다. 내 동시의 절반은 아이들이 채워주었다. 두 아이와 치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남편 함기석 시인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를 맡아주신 선생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김현서(본명 김현순ㆍ金鉉順)
1968년 강원 홍천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사상> 시 당선, 2005년 <아동문예문학상> 동시 당선 아동문예문학상> 현대시사상>
2006년 시집 <코르셋을 입은 거울> 출간 코르셋을>
[심사평] 생활 속의 소재 세밀한 묘사 눈길
신춘문예 작품을 심사할 때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작품을 읽는다. 그것은 기존의 동시 작품을 훌쩍 뛰어넘는 새롭고 참신한 작품이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러나 '그저 그렇구나'하는 작품만 발견될 때는 적잖이 실망을 할 때도 있다.
대상(소재)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사물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쓴 작품을 보면 더욱 그렇다.
다행히 올해 응모된 작품 가운데는 그런 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아서 좋았다. 예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늘지 않았지만, 전반적인 수준은 많이 향상됐다. 동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유치하게 쓴 작품이 별로 발견되지 않았고, 사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소재나 주제가 낡고 상투적이어서 시적 감흥을 자아내지 못하는 작품도 있었다. 또 구어체적인 동시도 많이 발견됐는데, 그러한 작품은 대부분 설명적이고 시적 긴장감을 주지 못했다. 동시도 엄연히 '시'라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런 오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예심을 거쳐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별> (류영순) <가을> (황영선) <나무> (김인옥) <3초만 웃어 봐>(추필숙) <택배> (박선미) <세탁기> (김현서) 등 6편이었다. 세탁기> 택배> 나무> 가을> 별>
이들 작품들은 시적 기반을 탄탄히 갖추고 있는 등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류영순씨 작품은 시적 감성이 살아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막연한 생각으로 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황영선씨와 김인옥씨의 작품은 사물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고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이 돋보였으나 참신하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박선미씨의 작품은 상황 묘사를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펼쳐 놓았을 뿐 아니라 앞뒤의 짜임도 매우 탄탄했다. 그러나 발상이 기존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것 때문에 뒤로 밀려났다.
결국 지적사항이 제일 적은 김현서씨의 <세탁기> 를 당선작으로 올렸다. 일상에서 발견된 생활의 소재를 막연하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친구와 싸운 일을 세탁기와 절묘하게 연결시킨 점이 돋보였다. 세탁기>
갈등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여 상황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점도 좋았다. 함께 보내 온 두 편의 작품이 당선작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이만하면 앞으로 잘 쓸 수 있겠다는 믿음에 심사위원 두 사람이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노원호(동시인) 이상희(아동문학가)
세탁기 / 김현서
세탁기가 돌아간다
코피 묻은 내 옷도 돌아간다
친구의 얼굴도 돌아간다
화가 난 내 마음도 돌아간다
세탁기는 돌면서
꽁꽁 뭉쳐 있던 멍든 내 마음을
비틀었다가 풀어버리고
비틀었다가 풀어버린다
울컥울컥 검은 물이 쏟아진다
먹구름 속에서
해님이 나온다
눈부신 햇살 받으며 옷을 넌다
활활 털어 빨랫줄에 넌다
어느새 말끔해진 내 마음도 넌다
친구를 찾아가는 내 마음
먼저 사과하고 싶은 내 마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집게로 꼭 집어 넌다
사진 이종철기자 bellee@hk.co.kr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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