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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사형] 파란만장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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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사형] 파란만장 일생

입력
2006.12.3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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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지원 받으며 중동 맹주 부상 '전쟁광-영웅' 두 얼굴의 독재자91년 걸프전·2003년 이라크전… 부시 父子와 두 차례 대결 '악연'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세력을 물리친 이슬람의 영웅 살라후딘(살라딘)처럼 서방세계와 대항하며 아랍의 패권을 손에 쥐려던 야심 많은 독재자였다. ‘전쟁광’과 ‘아랍 민중의 영웅’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 그는 사실상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컸고, 결국 미국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1937년 4월 28일 바그다드 북쪽으로 150㎞ 떨어진 티크리트시 변두리에서 태어난 후세인은 생후 8개월 만에 고아가 돼 외삼촌에게 길러졌다. 18세 때 바그다드로 상경,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56년 반정부 봉기를 계기로 이듬해 범아랍 사회주의 부흥당인 바트당에 입당한다. 쿠데타와 대통령 암살 모의 등에 참여했던 그는 외국 도피, 수감생활 등을 하다 68년 바트당의 재집권 계기가 된 쿠데타에서 핵심역할을 한 뒤 마침내 79년 이라크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다.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꿈꾸던 후세인은 80년 9월 이란ㆍ이라크전을 일으킨다. 초반 이라크가 이란에 밀리자 미국은 물류와 기술뿐 아니라 이란군의 이동정보와 무기까지 이라크에 제공했다. 82년 미국은 이라크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했고, 83년 11월 미 국가안보회의(NSC)는 이란의 승리를 막기 위해 ‘합법적이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놓기도 했다. 그해 12월에는 나중 조지 W 부시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맡아 후세인을 파멸로 내몬 도널드 럼스펠드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특사로 후세인을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럼스펠드는 유엔이 이라크가 이란에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날인 이듬해 3월 24일에도 이라크를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랍권은 미국이 후세인 재판을 더 진행할 경우 당시 미국이 화학무기를 이라크에 제공했다는 의혹이 불거질 수 있어 처형을 서둘렀다는 분석도 내 놓는다.

88년 이란과 휴전협정을 맺은 뒤 전쟁에 따른 외채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90년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괴물’을 키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91년 1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을 결행,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냈다.

잇따른 실정에도 불구하고 후세인은 95년과 2002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100%에 가까운 압도적 찬성으로 대통령직을 이어갔다.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철권통치 때문이었지만, 이라크를 100만명의 군사력을 가진 중동의 군사강국으로 변모시키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어깨를 견주는 산유국으로 키운 공로를 인정 받기도 했다.

유엔의 경제제재 등 국제적 고립, 미국 및 영국의 군사적 압박에 시달리던 후세인은 결국 9ㆍ11 테러 이후 아들 부시 대통령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뒤 두 아들을 공습으로 잃고 권좌에서 쫓겨나 도망자가 됐다. 세대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부시 부자와 충돌했던 그는 결국 같은 해 12월 고향 티크리트의 농가 토굴에서 미군에 체포됐다. 이듬해 이라크 정부로 인계된 후세인은 2005년 이라크 특별법원에 기소됐다. 이 달 26일 최고항소법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됐다.

최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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