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떡 좀 드세요.” “재혁이는 왜 아직 안 오니?” “형님, 대낮부터 뭔 술을 그렇게 드시우?”
2006년 병술년(丙戌年) 마지막 날인 31일 서울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허성광(66ㆍ파워맥스 대표)씨 집은 49평이 매우 좁게 보였다.
현관문을 열자 20명이 넘는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들고 있다. ‘5대(代)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흔 넷의 안팔분 할머니부터 두 살 배기 현손(玄孫)까지, 왁자지껄 얘기하며 음식을 먹는 모습은 마치 결혼식 피로연 같았다. 거실은 더 이상 발 디딜 틈도 없다. 가족을 왜 ‘식구(食口)’라고 부르는지 알 만도 했다.
“가족들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어 휴일이면 자주 모이는 편이지요.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가족들로 시끌벅적한 게 화목한 집안이라고 생각했죠.” 쉰을 넘긴 손녀 허완옥(53)씨가 늦게 오는 식구들을 위해 상을 하나 더 펴며 말했다.
이날 모임은 1일 결혼 58주년을 맞는 큰 아들 허찬(77ㆍ자영업)씨 내외를 축하하기 위해 동생 성광씨가 마련했다. 병술년을 보내고 가족들이 함께 정해년(丁亥年) 돼지 해를 맞는 뜻 깊은 자리이기도 했다.
허찬씨는 두 동생과 6남매, 조카들, 손자, 손자며느리가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받아 마시느라 불콰해진 얼굴로 “식구들이 가장 큰 재산”이라며 기분 좋게 웃었다. 다산(多産)이 곧 복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집안 식구들이 이렇게 많은데 아픈 사람 하나 없는 게 다행이지. 내가 뭘 더 바라겠어. 식구들이 올해처럼 건강하면 그걸로 된 거지.” 집안의 최고 어른인 안 할머니의 새해 소망은 소박했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혼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장을 보러 다닐 정도로 건강한 안 할머니는 오히려 “회사 다니고 공부하느라 아이들이 고생”이라고 걱정했다. 세 아들과 장손 허완(56ㆍ자영업)씨의 집을 옮겨 다니며 생활하는 안 할머니는 “50명이 넘는 자식, 손주들이 큰 욕심 내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2대인 맏며느리 장남순(75)씨도 “공부면 공부, 회삿일이면 회삿일 모두 잘 됐으면 좋겠다”며 ‘작지만 큰’ 새해 소망을 얘기했다. 젊은 시절 열 살 안팎 터울의 시동생들과 6남매를 키우느라 고된 생활을 했던 장씨는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가족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집안 장손인 3대 허완씨도 “새해에는 올해보다 웃을 수 있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했다. 1년에 다섯 번 있는 제사 등 집안 대소사를 책임진 부인 김광옥(56)씨는 “정해년에는 일이 많아도 좋으니 이런 자리를 더 자주 가질 생각”이라며 웃었다.
안 할머니 집안에는 두 달 전 4대 허석(32)씨가 아들을 낳아 5대 손주가 3명이 됐다. 4대인 허수정(30ㆍ여)씨는 “내년에는 황금돼지띠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고 수줍게 말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정민승기자 msj@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